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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금요일] 미 부자 가문의 정치 성향

중앙일보

입력

“남북전쟁은 경제 전쟁이었다. 패전은 곧 남부 경제의 붕괴를 의미했다. 동시에 남부 부호들의 몰락이기도 했다.”

미국 정치 평론가 겸 역사가인 케빈 필립스가 2002년 펴낸 『부와 민주주의』란 책에서 밝힌 내용이다. 남부 농장주들이 남북전쟁 패전을 계기로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그들은 건국 이후 한 세기 동안 미국 부를 쥐락펴락했다. 이들의 몰락은 한 정당의 경제적 토대가 약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바로 미국의 초기 민주당이었다.

노벨경제학 수상자인 고(故) 로버트 포겔은 2000년에 발표한 책『4차 대각성운동(The Fourth Great Awakening)』에서 “미국의 산업혁명은 남북전쟁(1861년) 발발과 함께 시작했고, 대기업의 등장은 1870년대 본격화했다”고 설명했다. 공화당이 주로 집권하던 시기에 산업 자본가들이 성장한 셈이다. 이들이 공화당을 선호한 것은 당연했다.

현재도 부호 가문들의 공화당 선호는 여전하다. 미 경제매체인 포브스는 “미국 50대 가문의 정치성향을 분류하면 절반 이상이 공화당 쪽”이라고 최근 보도했다. 부호 가문의 모든 구성원을 조사한 결과는 아니다. 주요 구성원의 정치 헌금을 바탕으로 한 분류다. 민주당 쪽 부자 가문은 15%도 되지 않는다.

가문별 정치성향은 개별 억만장자보다 훨씬 친공화당일 수 있다. 포브스는 “부호 가문의 재산은 대부분 상속받은 것”이라며 “이들은 최근 정보기술(IT) 억만장자들과는 달리 정치성향도 보수 쪽으로 치우친다”고 설명했다.

실세 2위 억만장자 가문인 코흐 형제는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다. 에너지 기업인 '코흐 인더스트리' 소유주인 두 사람의 돈은 상속재산이다. 올드 머니(Old Money)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조상은 대공황 직전인 1927년 원유에서 휘발유를 뽑아내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 부를 일궜다.

코흐 형제가 2012년 대선에 쓴 돈만도 6000만 달러 정도(약 690억원)였다. 당시 뉴욕타임스(NYT)는 “코흐 형제는 공개적으로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의 낙선을 위해 거액을 썼다”고 전했다.

반면, 민주당 쪽 억만장자들은 20세기 후반에 재산을 일군 경우가 많다. ‘헤지펀드의 귀재’인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 회장이 대표 인물이다. 그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당선과 재선을 막기 위해 공세적으로 정치자금을 뿌렸다. 그런데 포브스는 소로스를 부호 가문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집안에서 처음으로 부호 반열에 올랐다. 아직 한 번도 상속이 이뤄지지 않아서다.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도 20세기 후반에 부자가 됐다. 여전히 건재해 재산 상속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재산을 복지재단에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포브스 기준 부호 가문으로 분류될 일이 없어 보인다.

억만장자 패밀리는 가문 차원에서 후원조직을 만들어 뜻에 맞는 정당을 지원한다. 1위 부자 가문인 월튼(우러마트 소유)은 ‘월마트정치행동위원회(WPAC)’를 통해 해마다 수백만 달러를 정치에 투입했다. 후보와 정당에 정치자금을 대줄 뿐 아니라 막대한 광고비를 투입해 지지 후보의 정책이나 정당의 정강을 대신 알려주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부호와 공화당의 밀월은 미국 역사에서 진보의 시대(Progressive Era)로 불리는 20세기 초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소수의 부호들이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다. 대공황을 거치면서 일부 부호들은 공화당과 거리를 두었다. 50대 부자 가문 가운데 친민주당 쪽이 15% 정도되는 배경이다.

전문가들은 업종별로 부호 가문의 정치 성향이 조금씩 다르다고 말한다. 정치평론가 필립스는 “석유 등 에너지, 곡물, 군수 산업 가문은 전통적으로 아주 보수적”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이들이 내는 정치헌금도 거의 7대1의 비율로 공화당에 많이 지원된다. 민주당이 환경 규제를 강화하고 군축을 강조하는 정당이란 점에 비춰 그럴만도 하다.

반면, 미디어나 IT(정보기술) 업종에 종사하는 가문 중에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쪽이 많다. 역사적으로 지미 카터 행정부(1977~81년)에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재미를 봤다. 또 빌 클린턴 행정부(1993~2001년) 땐 IT 혁명기였다.

딘 베이커 경제정책연구소(CEPR) 공동 소장은 최근 칼럼에서 “클린턴 시절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에 민주당과 부자의 거리감이 줄어들었다”며 “진보적인 민주당원들은 클린턴 시절을 배반의 시대라고 부른다”고 했다. 대신 민주당의 돈줄이 튼실해졌다. 책임정치센터(CRP)에 따르면 2014년 중간선거 전후 민주당은 8억 5000만 달러 정도를, 공화당은 6억7000만 달러 정도를 후원금으로 거둬들였다. 부호 가문들이 선호하는 공화당이 민주당보다 적게 후원받았다. 물론 두 당의 지난해 전체 정치 후원금은 각각 17억 달러 정도였다. CEPR 베이커 소장은 “클린턴 행정부 때 친민주당 기업과 부자들이 많이 생겨난 게 두 당의 정치자금이 비슷해진 이유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 미국은 다시 대통령을 뽑는다. 부호 가문이 선택해야 할 시기다. 누구를 후원할 것인가. 올해는 쉽지 않다. 공화당 후보가 난립했다. 젭 부시와 도널드 트럼프 등 14명이 대선 후보가 되겠다고 나섰다. 공화당 역사에서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이전까지 후보난립은 민주당의 풍경이었다.

지난달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코흐와 월튼 가문이 후원금을 선뜻 내놓지 않는다”고 전했다. 지지할 만한 후보의 지지율이 시원찮아서다. FT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지지율이 높은 바람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달 9일(현지시간) 미 연방선거관리위원회는 뜻밖의 자료를 공개했다. 민주·공화 경선주자들의 정치자금 모금 내용이었다. 가장 많은 후원금을 모은 사람은 젭 부시 전 플로리다주 지사였다. 1억2800만 달러 정도였다. 2위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9776만 달러 정도였다. 공격적인 발언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트럼프는 583만 달러를 모금하는 데 그쳤다.

톰슨로이터는 “민주·공화 경선주자 18명 가운데 트럼프의 모금 순위는 12위”라며 “특히 부호들의 후원을 가늠해볼 수 있는 ‘개인 고액 기부’ 비중이 20%도 되지 않았고,‘정치활동위원회(PAC)’후원은 없었다”고 전했다. 부자들의 눈에 달갑지 않은 존재란 얘기다.

대신 부자 가문들은 지난달까지 관망하다 최근 들어 본격적으로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젭 부시 쪽으로 기울고 있다. NYT에 따르면 미 158개 부자 가문 가운데 87% 이상인 138개 가문이 공화당 후보를 지원하고 있다. 반면 민주당 쪽은 20개 가문에 그치고 있다. 포브스가 집계한 50개 가문 정치 성향과 비슷하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부호들의 눈에 내년 미국 대선은 중요한 선거(critical election)으로 비친다”고 최근 전했다. 빈부격차가 낳은 사회 갈등에다 테러가 잇따르고 있어서다. 경제전문지인 배런스는 “부자들은 포괄적인 안전에 더욱 민감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들이 신체 안전뿐 아니라 부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어서다. 실제 민주당 내에서 보수적인 힐러리마저 증세와 분배를 부르짖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 사회가 왼쪽으로 기울고 있는 단서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부자 가문의 공화당 지지가 더욱 강해질 전망이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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