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빚내 집 한채, 실손보험 중복 … ‘금융 무지’에 노후가 춥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50대 주부 강주현씨는 밤잠을 설친다. 중소기업 임원인 남편이 퇴직금 중간정산으로 받은 목돈 1억원이 ‘반 토막’ 났기 때문이다. 강씨는 3년 전 시중은행 직원의 권유로 남편 퇴직금을 파생결합증권(DLS)에 몽땅 털어 넣었다. DLS가 뭔지도 몰랐지만 원유 값이 40% 이상 떨어지지만 않으면 매달 10%의 이자를 준다는 말에 솔깃했다. 그러나 지난해 이후 원유 값이 폭락하면서 이자는커녕 원금을 5400만원이나 까먹었다. 강씨는 “남은 돈마저 잃을까 겁나 이자도 거의 없는 예금에만 묻어 두고 있다”고 말했다.

반퇴세대, 금융 IQ 높여라 <상> 심각한 금융문맹
반퇴세대 자산관리 문제는
가계자산 73% 부동산 등에 쏠려
시장 침체 땐 중산층 노후 위험
“퇴직 후에도 일정 수입 들어오게 부동산에 몰린 자산 분산해야”

 #유통회사에 근무하는 유모(52) 상무는 서울 강남에 있는 10억원짜리 아파트가 가진 자산의 전부다. 억대 연봉을 받지만 아들 둘 교육비와 노부모 생활비에 대출금 이자를 빼고 나면 저축은 언감생심이다. 언제 직장을 그만둬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공적 연금 외에 별다른 노후 대비도 하지 못했다. 유 상무는 “아들 둘이 대학 진학을 마칠 때까진 집을 팔기도 어렵다”며 “집이 전 재산인데 앞으로 집값이 오르는 건 고사하고 유지라도 할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기사 이미지

 극단을 오가는 투자와 운용, 그리고 쏠림. 한국 반퇴세대의 ‘자산 건강’에 켜진 적신호다. 금융 환경은 저성장·저금리로 바뀐 지 오래다. 수명도 갑자기 늘었다. 그러나 자산 관리는 여전히 고(高)성장·고인플레 시대 관성에 무계획적이다. 여기다 ‘금융문맹’ 상태에서 어설픈 투자로 실패를 반복하면서 생긴 집단 트라우마의 흔적도 포트폴리오에 짙게 배어 있다.

 대표적 특징이 부동산 쏠림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한국 가계 자산의 73.2%가 부동산 등 비(非)금융자산에 몰려 있다. 금융자산 비중은 26.8%에 그친다. 반면 미국 가계는 금융자산 비중이 70.1%에 달하고 ▶일본(61.6%) ▶영국(52.2%) ▶호주(39.4%) 등 대부분의 선진국도 금융자산 비중이 한국보다 훨씬 높다. 푼돈인 금융자산도 그나마 현금과 예금에만 몰려 있다. 전체 가계 자산 중 주식·채권·펀드 등 투자상품 비중은 12.5%에 그친다. 역시 미국(52%)·영국(27%)·호주(23%)·일본(20.6%)에 비해 크게 낮다.

기사 이미지
기사 이미지

 대표적 간접투자상품인 펀드 비중은 2008년 7.2%에서 지난해 말 3.7%까지 떨어졌다. 같은 기간 미국(10.5%→12.9%), 일본(3.5%→5.5%) 등 선진국 가계가 초저금리에 맞서 펀드 투자 비중을 높인 것과는 정반대다. 쏠림은 충격에 취약하다. 김동엽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이사는 “우리나라 중산층 자산은 급할 때 현금화가 어려운 부동산에 몰려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자칫 부동산시장의 조정과 반퇴세대의 대량 퇴직이 맞물려 부동산시장이 침체되면 중산층의 노후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빚 관리도 요령부득이다. 은퇴하기 전 빚을 줄여 놓는 선진국 가계와 달리 한국은 나이가 들수록 빚 부담이 오히려 늘어난다. 60대 이상의 소득 대비 부채 비율이 161%로 전체 평균(128%)을 훌쩍 넘어선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김지섭 연구원은 “미국 가계는 40대 중반부터 빚을 줄여가는데 한국은 자녀 교육비 부담 등으로 빚을 줄일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금융상품도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못한다.

 대표적 보장성 보험인 실손의료보험을 2개 이상 든 ‘중복 가입자’는 약 160만 명에 이른다. 실손보험은 실제 들어간 의료비만큼만 보상하기 때문에 여러 개 가입한다고 보험금을 더 탈 수 없다. 조재영 NH투자증권 강남PB센터 부장은 “지인 부탁에 이것저것 가입해 놓고 보험료가 얼마나 빠져나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무계획적 자산 관리의 종착역은 ‘소득 절벽’과 노후 빈곤일 수밖에 없다. 자산을 불리는 데만 초점을 맞춘 단순 재테크가 아니라 20~30년 앞을 내다본 ‘반퇴테크’가 절실한 까닭이다. 김진영 신한은행 신탁연금본부장은 “대부분 반퇴세대가 금융문맹이다 보니 은퇴에 대한 공포심에만 사로잡혀 있다”며 “부동산에 쏠려 있는 자산을 분산해 퇴직 후에도 일정한 수입이 들어오도록 조정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조민근·박진석·강병철·염지현·이태경·김경진·정선언·이승호 기자
jmi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