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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조영래 ③ "전태일 평전, 다시 써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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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 평전을 다시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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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돌베개 출판사는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전태일의 평전을 출판했다(왼쪽).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의 저자라는 사실은 1990년이 돼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조 변호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의 이름이 새겨진 개정판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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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종덕(전 청계피복노조위원장)

"저는 일본에서 출간된 건 전혀 몰랐어요.

80년도인가 전태일 추도식 때 서남동 목사님이 그 책을 가져왔더라고요. 일본어로 된 책을 가져와서 높이 들면서 '일본에서 전태일 평전이 나왔다'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때 '저걸 빌미로 어떻게 하면 이제 좀 보급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제가 81년도에 수배되고 나서 수배자들하고 같이 인천 구월동에 아파트를 하나 얻어 모여 살았어요. 같이 생활하는 사람 중 하나가 돌베개 출판사 편집장이었어요.

그분이 '일본에서 출판된 그 책 번역을 해내겠다'는 거예요.

'번역해서 출판하면 좀 이렇게 제대로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저자에 대해서 전혀 얘기를 않고 "내가 그 원고가 있는데 그럼 이거에 대해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각오가 돼 있느냐?"고 물었어요. 굉장히 각오가 돼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원고를 주었어요.

그랬더니 번역 작업을 하던 것은 다 치워버리고 바로 출판에 들어가기로 했는데, 저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가 굉장히 문제가 되잖아요?

처음에는 제가 "서남동 목사 번역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했지요. 서 목사님도 흔쾌히 "좋다"고 하셨죠. 그 얘기를 듣고 문익환 목사(당시 전태일 기념관건립추진위원장)님이 "무슨 소리냐? 이렇게 훌륭한 책을 외국인이 쓴 걸로 하면 어떻게 하느냐. 다 책임을 질 테니까 전태일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명의로 해라."

그래서 그 명의로 해서 출판이 됐죠. 몇 년 동안 그런 상태였어요. 그때까지도 출판사에서도 전혀 저자가 누군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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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의 모친 이소선 여사와 민종덕.

90년도인가 조영래 변호사님이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제가 조 변호사님의 서소문 사무실을 찾아갔어요.

"지금쯤 저자가 누구인지 발표해도 괜찮지 않습니까?"하고 물으니까 그냥 빙그레 웃으시더라고요.

"아, 그래요? 그러면 허락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고 하니까 말리지도 않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제 됐다'고 생각했죠. 나오자마자 제가 바로 출판사에 연락을 했죠. "이제 저자 조영래로 해서 다시 이 책을 찍으면 좋겠다."고 했죠.

그런데 그때 저한테 상당히 진지하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전태일 평전을 다시 써야 된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잘못 써졌다"고 하셨죠. 난 의외였어요.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어차피 지식인 관점에서 쓴 책이다. 그다음 하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죽음을 미화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전태일 사건 이후에 나온 많은 열사들에 대해 굉장히 미안해하시는 표정이 딱 읽히더라고요.

나오자마자 제가 바로 출판사에 연락을 했죠. "이제 저자 조영래로 해서 다시 이 책을 찍으면 좋겠다."고 했죠. 출판사도 바로 시작했죠. 그런데 시간이 걸리잖아요. 나오기 직전에 돌아가신 거예요. 본인 이름이 적힌 책을 못 보고 그냥 돌아가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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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과 함께 한 3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됐던 조영래는 1973년 4월 만기 출소했습니다. 그러나 딱 1년 만인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의 자금책으로 몰려 6년간 수배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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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표(직업운동가 · 현 뉴스바로 대표)

"교도소에서 나와서 '전태일 전기를 하나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만날 오전에는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 어릴 때부터 뭐 등등을 다 적었어요.

그러던 차에 마침 조영래가 출소를 했어요. 그러다 민청학련 사건이 터져 또 수배됐죠. 조영래가 글을 잘 쓰고, 그에 비하면 저는 액티비스트입니다. … 제가 그 자료를 전부 다 조영래한테 넘겼죠. 공책만 한 거 2권 분량 정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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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의 영정 앞에 선 이소선 여사.

거기에다 이소선 어머니도 만나고, 청계피복 노동자들도 한 번씩 만나고 해서 썼죠.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의 수기와 일기를 최소한 100번 이상 보고 쓴 겁니다. 조영래가 글 재주가 있고 뭐 이론적인 능력도 있어서 쫙 이래 쓴 게 아니에요. 전태일이를 온전히 녹여서, 그걸 다시 내뿜어 놓은 겁니다. 그렇게 하려니까 3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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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순옥(전태일 열사 여동생 · 현 국회의원)

"제가 10대 때 처음 만났던 것 같아요.

첫인상은… 피부가 되게 하야세요. 항상 웃음을 머금고 계셨고, 제가 얘기를 할 때에도 굉장히 편안했어요. 그때도 담배를 많이 피우셨죠. 처음 만나서 끝날 때까지 담배를 피우셨으니. 저한테 오빠에 대해서 많이 물어봤어요. 그렇게 만나면서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극장에서 많이 만났고요. 조조할인. 강남에 있던 빵집이 하나 있었어요. 뉴욕제과라고 거기서 빵도 사 주시고 빙수도 사 주시고.

종로에 있는 극장에 갔는데 극장 가서 영화를 본다기보다는 항상 저한테 "신문을 봐라" 그랬어요. "신문을 읽어야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고 하셨죠.

그런데 신문이 전부 한문이니까 보기가 힘들잖아요. 저한테 옥편을 하나 사다 주셨어요. 어느 날 갖고 오셔서 옥편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죠. "이 한문이, 네가 예를 들어서 하늘 천을 모를 때는 어디 몇 장을 이런 식으로 넘기면 찾아볼 수 있고…" 극장 안에서 그걸 가르쳐 준 거예요.

그러면서 신문을 하나씩 갖고 와서 "읽어봐라" 하시고. 그 뒤론 공장에 다니면서도 옥편을 가지고 계속 신문을 봤어요.  옥편을 찾아서 보고 있으면 제 위에 미싱사 언니가 머리를 톡 치면서 "너는 뭐, 대학생 될래?  박사 될래?"이랬죠. 신문을 열심히 보고 나서 다음에 조영래 변호사님 만났을 때 제가 본 내용을 자랑하죠. '한문 이런 것도 찾았고 이런 것도 찾았고, 이 내용을 내가 이렇게 읽었다' 하면서요…"

정리   임장혁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편집   박가영 기자 · 김현서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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