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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경민의 시시각각

소비 회복은 착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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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민
정경민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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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민
경제부장

오랜만에 도는 온기다. 연말연시를 앞둔 백화점엔 활기가 넘친다. 살림이 쪼들릴 때 제일 먼저 줄이는 건 새 옷 장만이다. 그런데 지난달부터 옷이 팔리기 시작했다. 체크카드로 구입한 10대 품목에 올 들어 처음 기성복이 끼었다. 지난 3분기 카드·자동차 할부를 합친 가계신용도 63조4000억원으로 3조9000억원이나 늘었다. 3분기 실적으론 2002년 한국은행이 통계를 만들기 시작한 후로 가장 큰 폭이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이 덮쳤던 2분기 5000억원에 비하면 8배다.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소비자심리지수(CCSI)도 5개월째 회복세다.

관제 세일, 개별소비세 인하로 반짝
일자리 뒷받침 안 되면 내년 소비 절벽

 지난해 세월호에 이어 올해 메르스로 빙하기에 갇혔던 소비에 온기가 돌기 시작한 건 다행이다. 그나마 소비가 살아난 덕에 수출이 죽을 쒔어도 경기가 버텼다. 그러자 정부나 한은은 내년에도 소비 덕에 경기회복세가 이어질 거란 전망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우리 경제는 내수 중심의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며 “성장 모멘텀을 올해 4분기에 이어 내년까지 이어간다면 내년에는 3% 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경제부총리가 낙관론을 펴는 걸 탓할 순 없다. 경제는 심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단이 빗나가면 처방도 사람 잡기 십상이다.

 우선 소비 회복세가 내년까지 이어질지가 미지수다. 최근 소비 회복은 ‘관제(官製)’ 성향이 짙다. 지난 8월 ‘코리아그랜드세일’에 이어 10월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11월 ‘K-세일’까지 정부가 주도한 할인 행사가 소비자를 백화점으로 이끌었다. 그 틈에 유통업체는 묵혔던 재고를 털어냈다. 그러나 할인 행사는 일종의 외상이다. 내년 지출을 미리 앞당겨 쓴 셈이다. 내수 회복을 이끌 만큼 자동차가 불티나게 팔린 것도 지난 8월 개별소비세를 30%나 깎아준 덕분이었다. 개소세는 내년 1월 1일 원상 회복된다. 정부 지출도 당겨 쓴 만큼 내년 초 곳간은 허전해질 수밖에 없다.

 소비를 뒷받침해준 부동산 경기도 위태롭다. 올해 건축 인허가를 받은 주택은 70만 가구가 넘을 전망이다. 분당·일산 신도시를 지은 1990년 이후 최대다. 그만큼 아파트 건설현장도 늘었다. 현장엔 돈이 돈다. 그러나 위례와 동탄을 끝으로 당분간 신도시 개발은 없다. 건설회사는 더 짓고 싶어도 땅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내년 건설 경기가 올해만 못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여기다 고삐 풀린 전셋값에 월세 확산으로 주거비 부담은 껑충 뛰었다. 다음달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를 올리면 대출금 이자 부담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비록 관제 소비 붐이라도 마중물이 돼 투자를 자극한다면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국내 제조업은 이미 코가 석 자다. 중국이 수출에서 내수 주도로 성장 전략을 바꾸는 통에 신규 투자는커녕 과잉 설비 줄이기도 벅차다. 삼성·현대차·SK 같은 대기업조차 가망 없는 사업을 정리하기에 급급하다. 금리가 오르기 시작하는 내년엔 ‘좀비 기업’ 퇴출도 봇물을 이룰 수밖에 없다. 소비 회복이 투자를 자극하고 일자리가 늘어나 다시 소비 확대로 이어지는 교과서적인 선순환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 마당에 외상으로 쓴 소비 청구서마저 날아들면 내년엔 ‘소비 절벽’과 맞닥뜨릴지 모른다.

 풍전등화 같은 소비 불씨를 살릴 유일한 묘약은 일자리다. 제조업은 다이어트 중이니 일자리가 나올 구멍은 서비스업밖에 없다. 사람 장사인 관광산업은 일자리 보고(寶庫)다. 마침 내수 부양정책 덕에 지갑이 두툼해진 유커(遊客)도 몰려오고 있다. 한데 국회가 발목을 잡고 있다. 기껏 마련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관광진흥법·국제의료사업지원법 같은 경제활성화법안은 국회 벽에 갇혀 있다. 내년부턴 정년도 60세로 연장된다. 노동개혁법안이 무산되면 ‘고용절벽’은 깊어진다. 시간도 촉박하다. 올해를 넘기면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란 블랙홀이 기다린다. 개혁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 나오기보다 어려워진다. 반짝 소비 회복에 취해 졸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정경민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