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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가수 박기영, 17년 전의 사진

중앙일보

입력

가수 박기영, 그녀의 인터뷰 통보를 받으며 대뜸 17년 전의 사진이 떠올랐다.

1998년, 그녀가 첫 앨범을 내고난 직후였다.

당시 가요담당이던 선배가 ‘대단한 물건’이 탄생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웬만해선 흥분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 선배였다,

평상시답지 않은 극찬이었다.

첫인상, 아주 왜소했다.

몸무게가 40kg이라 했다.

인터뷰에 응하는 목소리도 차분했다.

그런 그녀, 카메라 앞에서 돌변했다.

몸무게 40kg의 그녀, 카메라 앞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여줬다.

첫인상을 한순간에 잊게만드는 로커의 에너지였다.

그 후 신문에 난 기사 제목이 "신인 여성로커 박기영 선배 뺨치는 ‘무대 대반란‘" 이었다.

사진을 한 장 프린트 해둔 기억이 떠올랐다.

사무실, 집, 창고, 여기저기 뒤졌다.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왔다.

자그마치 17년이다.

당시 찍은 사진 이야기로 17년치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금세 17년 전의 사진을 기억해냈다.

사진의 포즈까지 기억하며 반가워했다.

“그 당시 별명이 ‘도날드 덕’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맞아요?”

“그런걸 기억하세요? 말이 많다고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이에요.”

별명이 지어진 이유, 내 기억과는 달랐다.

입이 앞으로 나온 편이라 친구들이 ‘도날드 덕’이라고 부른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틀린 기억의 간극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도날드 덕’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는 건 첫 촬영의 인상이 그만큼 강했다는 게다.

17년치 기억을 더듬고 난 후, 코트를 벗으려 했다.

사진을 먼저 찍겠다는 신호였다.

인터뷰 후 사진을 찍겠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연예인이라면 몇 번씩 사진을 찍게 마련이다.

그런데 17년만의 촬영이니 저간의 사정이 있으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저간의 사정이 듣고 싶었다.

“2012년 TV 오페라 경연 프로그램 ‘오페라 스타2’에서 우승한 후, 딸을 낳았어요.

껌 딱지 아기와 한 몸이 되어 살며 땅바닥을 기는 ‘살림녀’가 되었어요. 한동안 아이가 유일한 청중이었어요.”

아이를 낳고나서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아서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고 했다.

잊히어 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살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했다고 했다.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사람인지 젖소인지 모를 정도로 우울했어요. 그래도 엄마가 되길 잘했다 싶어요. 나를 내려놓고 타인을 이해하는 일, 그걸 배우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엄마로 살면서도 지난달 박기영이 낸 앨범(A Primeira Festa)이 팝페라 앨범이다.

대개 성악가의 영역이지만 대중가수 최초로 팝페라 앨범을 낸 게다.

“오페라스타를 하면서부터 체계적 레슨을 받았어요. 사실 당시 별명이 ‘반이’였어요.

연습의 반 뿐 못 한다고 한경미선생이 지어준 별명이에요.

손가락 바들바들 떨면서 방송했어요. 사실 무대에 서는 사람은 줄 위를 걷는 사람과 마찬가지예요. 두려움과 싸우며 무대에 서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당당한 박기영’ 이라 콘셉트를 정했다.

첫 셔터를 누르기 전에 우스개를 했다.

“오늘의 사진 콘셉트는 당당한 ‘도날드 덕’입니다.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세요.”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서 잃었던 목소리,

아이가 유일한 청중 이었던 가수,

무대에서 바들바들 떨던 ‘반이’,

그러면서도 대중가수 최초로 팝페라 앨범을 낸 가수,

당당한 ‘온이’ 가수, 박기영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그녀가 돌아간 후, 짬날 때마다 뒤졌다.

17년 전의 사진을 찾아보고 싶었다.

며칠 만에 찾았다.

기억과 다른 사진보관함에 있었다.

17년치 먼지가 묻었다.

색도 바랬다.

그래도 사진 속 가수 박기영의 에너지는 그대로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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