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최고의 유산] 네 맘은 어떠니. 어린 딸 마음 헤아린 동화작가 정채봉의 질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고 정채봉 맏딸, 정리태 작가 가족

기사 이미지

아버지(동화작가 정채봉)와 함께 전남 목포 가는 배에 오른 어린 시절의 정리태(사진 가운데)씨와 오빠. 정리태씨는 “유난히 우리 남매를 사랑하셨지만,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남매가 싸우기라도 하면 회초리를 들 정도로 엄격했다”고 떠올렸다. [김경록 기자]

기사 이미지

정리태(가운데)씨와 두 자녀 신채호(초4·왼쪽)·채인(초2) 남매. 자신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버지의 동화를 읽고 자란 정 작가는 엄마가 된 지금 자신이 자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화를 쓰는 작가가 됐다. [김경록 기자]

아버지가 제일 많이 물어본 게 마음
어릴 적 꽃씨 잃고 걱정하는 날 생각해
잃어버린 그 자리에 화단 만들어주셨죠
 

“세상에나 리태가 이렇게 잘 쓰는구나”
참 작은 일로 엄청나게 칭찬한 아버지
글쓰기 가르치는 대신 책 많이 읽게 해

아버지는 딸을 주인공 삼아 동화를 쓰곤 했다. 아이의 소소한 일상은 아빠의 펜 끝에서 예쁜 동화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쓴 이야기를 읽고 자란 딸은 자라서 아버지처럼 동화작가가 됐다. 동화작가 정리태(36)씨는 『오세암』으로 유명한 소설가 고 정채봉(1946~2001)씨의 맏딸이다. 정채봉 작가는 쉽고 일상적인 언어로 심오하고 철학적인 주제를 담담히 풀어 내려간 작품으로 ‘어른을 위한 동화 작가’라 불린다. 딸 정리태씨는 아버지가 간암으로 투병하던 1999년 한 일간지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굴뚝에서 나온 무지개』를 응모해 당선됐다. 큰 수술을 앞두고 있던 아버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어 병원에서 간호하며 틈틈이 쓴 동화였다. 생전의 아버지는 딸에게 항상 ‘어른도 아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딸은 아버지처럼 동심을 간직한 채 살고 있다.

동화 주인공도, 첫 번째 독자도 “사랑하는 리태”

“아버지는 새 책이 나오면 제일 먼저 한 권을 성모마리아 상 앞에 두고 감사 기도를 하셨어요. 그리고 나서는 ‘리태가 아빠의 첫 독자야’라며 제 손에 책을 쥐여주셨어요.”

아버지가 건네준 책 속표지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리태야’로 시작하는 편지가 있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글귀를 인용해놓고, 멋지게 사인도 해서 가장 먼저 저에게 책을 주셨어요. 어린 마음에 그게 얼마나 좋고 뿌듯했는지 몰라요.”

그는 아버지가 건네준 책을 찬찬히 읽는 게 즐거웠다. 책에는 자신의 이야기도 가끔 등장했다. 정 작가가 아직도 창피하게 생각하는 ‘꽃팬티 사건’도 아버지의 동화책에 수록된 내용이다. “지금도 얼굴이 빨개지는 얘기인데, 초등학교 때 엄마가 맨날 저한테 흰 팬티만 입히다가 꽃무늬 팬티를 한번 입혀준 거예요. 너무 기분이 좋고 자랑하고 싶은데 속옷이라 누구한테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었죠. 짝꿍에게 화장실 같이 가자고 해서 슬쩍 보여줬는데, 짝꿍이 ‘리태 팬티 진짜 예쁘다’고 소문을 내서 그날 우리 반 친구의 절반 정도는 줄 서서 내 팬티 구경하고 갔죠. 아버지는 이걸 소재로 동화를 쓰셨어요.”

『물에서 나온 새』라는 책에도 정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정 작가가 어린 시절 나팔꽃 씨를 주머니에 넣고 집 앞마당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다 넘어져 씨앗을 땅바닥에 흘린 적이 있다. 작은 나팔꽃 씨는 찾기가 어려웠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행여 누가 꽃씨를 밟을까 걱정이 됐어요. 그래서 제가 넘어진 곳을 중심으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아무도 못 밟지 못하게 했죠.”

아버지는 꽃씨가 다칠까 걱정하는 어린 딸의 마음을 무시하지 않았다. 딸의 그런 마음을 지켜주려 가족들이 그 동그라미를 지나다니지 못하게 했다. 한동안 가족 모두 동그라미가 있는 마당 한가운데를 피해 빙 둘러 다니다, 아버지는 그 동그라미 주변을 아예 꽃밭으로 만들어 줬다. “네가 흘린 씨앗도 여기 있으니, 꽃밭이 되면 저절로 싹이 날 거야”라고 하면서 말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잠을 자게 된 날 밤 무서워 울던 기억도, 유난히 ‘선생님 놀이’를 좋아해 화단의 꽃과 돌에 이름을 붙여가며 출석을 부르던 모습도 아버지의 동화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아버지가 딸에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은 “네 마음은 어떠니”였다. 딸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소식에도 아버지는 평소 시를 쓰고 싶어 했던 딸의 마음을 헤아려 “(동화작가가 된) 네 마음은 괜찮니”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제 마음을 먼저 살펴 주셨어요. 외면적인 그 무엇보다도 제 마음이 어떤지가 제일 중요하셨던 거죠.”

‘마음’은 정채봉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정 작가가 대학에 입학한 후부터 키운 강아지의 이름도 아버지는 ‘마음이’로 지었다. “통화할 때마다 강아지 안부를 물으며 ‘마음이 어떠니’ ‘마음이 잘 있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정말 좋다고 하셨죠.”

기사 이미지

대학 졸업식에서 아버지(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였던 것 같다.

 “누구보다 나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동시에 엄격한 분이셨다. 예의범절을 어기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회초리로 맞기도 했다. 성적이 떨어져도 혼이 났다. 대학 다닐 땐 통금 시간이 오후 10시였다. 하루는 반항심에 자정이 넘어서 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시며 엄청나게 꾸짖으셨다. 내가 뾰로통하니까 아버지는 피천득 선생님 얘길 꺼내셨다. 피천득 선생님은 딸 서영이랑 지하철 타면 행여 누가 와서 부딪칠까 두 팔로 감싸 안고 다녔고, 누가 쳐다만 보면 눈을 부릅뜨시고 ‘뭘 보냐’고 호통을 치셨다는 거다. 당신은 피천득 선생님에 비하면 유난스러운 게 아니니, 제발 일찍일찍 다니라는 얘기였다.

한번은 출판사에 보낼 원고 마감을 하루 늦춘 적이 있었는데 출판사와의 통화 내용을 들은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냈다. ‘네가 하루 늦게 원고를 보내면, 그 출판사의 이후 일정이 너 하나 때문에 촉박해져서 편집자나 디자이너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된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타인의 삶을 도둑질하는 일이다’라고 하셨다.”

기사 이미지

정리태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 정채봉의 동화들

- 사춘기 시절 갈등은 없었나.

“아버지가 너무 한다 싶은 때도 있었고, 사춘기 때는 일부러 아버지와의 대화를 피해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쓴 동화를 보면서 아버지의 아픔, 아버지의 힘든 삶에 대해 더 깊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대 뒷모습』이라는 책에는 할머니를 일찍 여의고 절절한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겼다. 중학교 때 이 책을 읽으며 아버지가 가여워 눈물을 뚝뚝 떨궜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시 중에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라는 작품이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딱 5분만이라도 만나고 싶어하는 내용이다. 마지막 구절이 ‘숨겨놓은 세상사 중 /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 일러바치고 / 엉엉 울겠다’인데, 지금 떠올려도 아버지의 외로움이 느껴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초승달과 밤배』는 가난하고 힘들었던 아버지의 성장기가 ‘난나’라는 주인공을 통해 표현돼 있다. 선장을 꿈꾸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눈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소설을 보고 ‘순수하고 투명하다’고 하는데, 내가 본 아버지의 현실은 별로 아름답지 않았다.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고 맑고 희망적인 작품을 쓰시는 게 대단하고 존경스러웠다.”

- 동화작가가 된 건 아버지 영향 때문인가.

 “아버지에게 혼도 많이 나고 회초리도 맞고 컸지만, 칭찬도 정말 많이 받았다. 내가 부모가 된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칭찬받을 일이었나’ 싶을 만큼 작은 일에, 엄청나게 칭찬을 쏟아부어 주셨다. 초등학교 시절 아빠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써서 드렸을 때 아버지는 그 편지를 읽으시더니 ‘세상에, 우리 리태가 글을 이렇게 쓰는구나’라며 감동 어린 표정으로 ‘세상에나’를 연발하셨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너는 작가의 감성이 있다’고 하셨다. 그 순간이 정말 잊히지 않는다. 그 뒤로도 내가 써놓은 간단한 메모, 연습장에 갈겨 써놓은 낙서 같은 걸 보시고도 ‘아빠는 리태가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자랑스럽고 행복하다’고 끊임없이 칭찬해 주셨다. 내가 글 쓰는 사람이 된 건 아빠의 이런 칭찬과 격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기사 이미지

정리태 작가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해의 생일에 아버지가 써준 편지. 아버지 정채봉 작가는 딸의 생일마다 편지를 써주셨다.

기사 이미지

정리태 작가가 자신의 두 자녀 채호와 채인이에게 쓴 편지.

- 아버지의 특별한 글쓰기 지도가 있었나.

“아버지는 한 번도 내 글을 고쳐주시거나 어떻게 쓰라는 지침을 준 적이 없다. 다만 일기를 쓰게 하고 다양한 책을 읽게 했다. 집 앞을 산책하다가도 ‘이 꽃 이름을 아니’라고 묻고는 꽃 이름과 유래를 알려주셨다. 그리고 ‘오늘 일기에는 이 꽃에 대해 쓰면 어떻겠니’라고 권하시는 정도였다. 식사하다가 ‘우리는 밥을 먹고 있을 때, 의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라고 물으셨다. 그리고 일기로 써보라고 하셨다. 일기를 보여달라고 하신 적은 없지만, 생활 속에서 글감을 찾는 법을 알려주신 것 같다.”

- 본인도 자신의 작품에 자녀를 등장시키나.

“아직 많은 작품을 발표하진 못했지만, 컴퓨터에는 여러 작품이 저장돼 있다. 거의 모든 작품의 주인공 이름은 채호와 채인이다(※정 작가 두 아이의 이름이 신채호·채인이다). 이상하게 내 아이의 이름을 쓰면 글이 줄줄 써질 때가 있다. 주인공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내가 잘 아는 아이 같으니까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아이의 말과 행동이 나를 감동하게 하는 순간이 있다. 며칠 전엔 채인이가 ‘엄마, 웃으면 봄이 와요’라는 말을 하는데,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머, 네가 어떻게 그런 표현을 하니’라며 아이의 손을 잡고 붕어빵을 사줬다. 아이의 사랑스러움과 놀라움을 동화에 담아 읽게 해주고 싶다.”

- 동심이란 뭔가. 동심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동심이란 아이의 마음이다. 전남 순천에 있는 아버지의 문학관에 가보면 ‘동심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쓰여 있다. 아버지는 살아계실 때도 ‘어른도 아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고 사람을 대할 땐 진심을 다하라고 강조하셨다. 고단하고 어려운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과 사랑을 꿈꾸는 게 동심이다. 현실에선 포기하는 게 타당하고 희망을 갖는 건 허황될 때가 많다. 이론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순수와 사랑을 유지하려면 동심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아빠도 삶의 고통을 동심으로 이겼다고 생각한다. 나도, 내 아이도 그 모습을 배워갈 거다.”

▷정리태

1978년 서울 출생
91년 서울 창동 월천초 졸업
94년 서울 창동 노곡중 졸업
97년 서울 하계동 혜성여고 졸업
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굴뚝에서 나온 무지개』
2000년 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인생의 롤 모델: 아버지 정채봉(“아빠의 문장을 닮고 싶다. 대학 때 아빠의 문체를 따라 썼더니 선배가 ‘이건 정채봉 선생님만이 쓸 수 있는 문체다.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다’고 조언해줬다. 그 순간 아빠가 ‘당신만이 쓸 수 있는 문체를 가진 독보적인 작가’란 사실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 기억에 남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대학 시절 아빠와 함께 본 영화)

○ 아버지가 권해준 책 중 인상 깊은 작품: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사자왕 형제의 모험』 『책상은 책상이다』

○ 내 아이에게 읽히고 싶은 아버지의 책: 『초승달과 밤배』(채호와 채인이가 고등학생쯤 됐을 때 할아버지에 대해 알려주며 함께 읽고 싶다)

○ 좌우명: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자

기사 이미지

글=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