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화 집필에 “노망들었나” … 명단 거론만 돼도 “친일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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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식(左), 최몽룡(右)

새 역사 교과서 집필 의사를 밝혔거나 국정화를 지지한다고 서명한 학자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선후배·동료로부터 “그만두라”는 압력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온라인상에선 ‘매국노’로 지목됐다.

신형식·최몽룡 교수에게 회유·만류
국정화 지지 교수 “학생이 욕설 글”
반대 표명 이승환엔 “빨갱이 가수”
강신명 청장 “집필진 신변보호할 것”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대표 집필자로 초빙한 신형식(76)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동료는 “국편이 초빙 사실을 밝힌 당일(4일) 학계의 원로급 학자가 그를 찾아와 ‘이 바닥에서 이러면 안 된다’ ‘죽고 싶으냐’며 회유하려 했다”고 전했다. 신 명예교수와 함께 집필진에 참여한 최몽룡(69) 서울대 명예교수도 4일 집까지 찾아온 후배 교수들의 만류로 이날 오전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못했다.

 인터넷엔 두 원로 학자들을 향한 원색적인 비난 댓글이 끊이지 않는다. 최 명예교수에겐 ‘치매기 있는 노인네’ ‘나이 드시고 욕 드시고 노망까지 들었나’, 신 명예교수에겐 ‘나라를 망치는 늙은이’ 식의 댓글이 이어졌다.

 일부 언론으로부터 ‘집필진 예상 학자’로 소개된 학자·교수들도 ‘홍역’을 치르고 있다. 이들 중 한 명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기사가 나자마자 학계 선배가 대뜸 전화해 ‘당신 어용이냐’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며 화부터 냈다. 설령 집필에 참여하고 싶었어도 (이런 분위기에선) 그만뒀을 것 같다”고 밝혔다. 또 다른 역사 전공 교수는 “교과서 집필에 뜻을 뒀다가 이런 적대적인 분위기에 놀라 포기한 교수도 있다”고 전했다.

 집필진 예상 명단이 담긴 기사엔 어김없이 ‘후손들이 친일파 이완용과 함께 거론할 것’ ‘권력의 입맛대로 역사를 조작한 인물로 기억될 것’처럼 댓글이 붙고 있다. 서울 소재 모 대학의 역사학 명예교수는 “제의를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거론돼 기사를 쓴 기자에게 항의하고 사과를 받았다. 하지만 악성 댓글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숨 쉬었다.

 향후 집필진 명단이 공개되면 이들에 대한 인신공격성 괴롭힘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상에서 더욱 기승을 부릴 전망이다.

 국정화 지지 의사를 공개한 인사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지지 선언에 서명했던 지방대 교수는 “이름이 나가자 항의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학생들마저 온라인 게시판에 욕설이 담긴 비난 글을 올려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국정화 반대 의사를 밝힌 유명인들도 사이버상에서 인신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4일 홍익대 인근에서 국정화 반대 콘서트를 열었던 가수 이승환은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이 받은 협박성 메시지를 공개했다. 한 누리꾼이 ‘반국가 선동의 선봉에 섰던 종북 가수 ○○○이 비참하게 불귀의 객이 됐다. 다음은 빨갱이 가수 이승환 차례’라고 쓴 글을 캡처해 올렸다.

 이처럼 국정화 참여 또는 찬반 의사를 밝힌 개인에 대해 테러에 가까운 비난이 빗발치자 강신명 경찰청장은 이날 국회 예결특위에 출석해 국정교과서 집필진이 요청할 경우 신변보호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강 총장은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의 자유 의사가 억압돼서는 안 된다. 교육부와 협조해 필요할 경우 신변보호 조치를 하겠다”고 말했다.

김선미·백민경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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