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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팬에게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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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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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논설위원

지난주 내내 신해철이었다. 벌써 일주기, 그를 기리는 행사가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JTBC ‘히든 싱어’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살아 있을 때 딱히 그의 팬인 기억은 없지만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요즘 대세인 미스터리 음악쇼 중에서도 ‘히든 싱어’의 특별한 점은 팬 없이는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원조 가수와 팬의 모창 대결이라 이성팬 아닌 동성팬에 한정된다(한 번의 예외가 있다). 사춘기 시절 유사연애로 시작되는 일반적인 아이돌 팬덤과는 조금 다르다. 말투까지 신해철과 판박이인 남성 출연자는 “형님 흉내를 내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민경훈 편에 나왔던 남성 출연자들은 ‘볼뽀뽀’를 요구해 가수를 당황케 했다.

 연예인 팬덤만 있는 게 아니다. 최근 각종 예능프로에서 각광 받는 탤런트 심형탁은 일본 애니메이션 ‘도라에몽 덕후(광팬을 일컫는 ‘오타쿠’에서 온 말)’로 알려지면서 인기가 올랐다. ‘덕후’는 한때 비호감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대접이 다르다. ‘덕후’가 곧 고수고, 전문가고, 엄청난 시장이기 때문이다. 실제 문화 창작자 중 상당수가 ‘덕후’·팬 출신이기도 하다.

 얼마 전 만난 유튜브의 광고 담당자는 “요즘은 그 브랜드의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고 열광하는 팬으로 만들어야 성공한 기업 광고”라고 했다. 대상을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팬으로 전환시키는 게 브랜드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얘기다. 어디 기업뿐인가. 어떤 정치적 패착에도 특정 정치인의 콘크리트 지지율이 유지되는 것도 팬 현상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제 누군가의 팬이라는 것은 성별이나 직업, 출신 지역만큼이나 현대인의 한 정체성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왜 이처럼 누군가에 열광하며 시간과 돈과 보상이 없는 애정을 퍼붓는 것일까(우리의 바람은 오직 상대의 성장뿐이다). 그저 순수한 열정과 몰입의 대상 자체가 필요해서일까.

 어쨌든 이제는 팬이 없다면 스타도, 기업도, 정치도 없는 세상이다. 일본에는 팬들이 이끄는 ‘오타쿠 경제’란 말이 있을 정도다. MBC는 각 분야의 고수가 된 ‘덕후’들을 모은 ‘능력자들’이란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이제 권력은 팬에게서 나온다. 팬덤을 모르고는 권력을 얘기할 수 없는 시대다. 더구나 우리에겐 부모의 헌신에 준하는 양육자 모델인, 아마도 세계 최강급 아이돌 팬덤이 있다. 팬덤은 이제 무차별적이고 비이성적인 열광을 넘어 현대사회의 흥미로운 증후군인 듯하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