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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닝과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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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일의 한·중 정상회담, 그리고 9월 25일의 미·중 정상회담에서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양 옆에 배석한 측근들의 모습이었다. 두 회담 모두 시 주석의 양측에는 정치국원들인 왕후닝 당 중앙정책연구실 주임과 리잔수(栗戰書) 당 중앙판공청 주임이 앉았다.

시진핑 주석과 아베 총리의 책사들
당대 최고의 전략가로 지도자 보필
우리 지도자는 누구와 상의하나

시 주석의 두뇌 역할을 하는 왕후닝은 상하이 푸단대학 교수 출신으로 1995년 당 중앙정책연구실로 옮긴 이후 정치국원들을 대상으로 한 집체학습을 기획해 왔다. 그는 또 장쩌민(江澤民) 이래 역대 중국 지도자들이 표방해온 핵심적 국가전략을 제시해온 책사로 알려져있다. 시 주석이 야심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對一路) 전략의 기획과 향후 추진도 왕후닝의 소관사항인 것으로 추정된다. 몇차례 정상회담의 자리배치를 통해 새삼 중국의 정치외교에서 왕후닝이라는 전략가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시 주석에게 왕후닝이라는 책사가 있다면,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게는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라는 전략가가 있다. 아베 총리는 취임 이후 국가안보전략 책정, 집단적 자위권 용인, 종전 70주년 관련 역사 담화 등 고도의 전략적 판단이 요구되는 현안들에 대해 전문가 자문회의를 구성하여 그들의 의견을 경청해 왔다. 그는 도쿄대 법학정치학부 교수 출신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 시대에도 유엔 차석대사 등을 역임하며 일본 정치외교에 관한 자문을 담당했다. 기타오카 교수는 아베 총리가 조직한 모든 자문기구에서도 핵심적 역할을 맡아왔다. 국가안보전략서에서 “국제협조주의에 입각한 적극적 평화주의”의 외교이념을 제시하였고, 집단적 자위권 용인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지난 8월 발표한 역사관련 담화에 침략전쟁에 대한 인정과 사과의 표현이 담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요컨대 중국이나 일본의 국가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추진하려는 국가전략의 책정과 수행에 있어 당대 최고 전략가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그들의 보좌를 받아가며 대내외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집체학습이나 간담회 등을 통해 수시로 각 분야 전문가들과 학습의 기회를 갖는 것은 물론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전통적으로 정치지도자들의 학습과 정책연구에 우리 선조들 만큼 정성을 쏟은 나라가 그다지 많지 않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사도’에서 영조는 세자에게 신하들에 의한 집중적인 서연을 받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교재를 편찬하여 세자에게 읽어보게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영조는 세자에게 조선이란 나라는 군주가 공부하지 않고 예법을 갖추지 않으면 신하들에게 권위를 내세울 수 없는 나라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국왕에 대한 경연과 세자에 대한 서연, 그리고 관리선발에 있어 과거 등을 통해 국가지도층이 국정에 관한 학문적 기반을 갖추도록 만들었던 제왕학의 전통이 동아시아 어느 나라보다 강했던 전통을 가졌었다. 그런 우리나라에 지금은 과연 왕후닝이나 기타오카 신이치와 같이 국가대전략의 방향을 국가지도자와 교감하면서 제시하는 제왕학적 전략가들의 존재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간의 정상회담 자리배치나 국가정책 관련 회의 영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국가지도자가 당대의 전략가들과 식견을 조율하면서 국가전략에 관한 메시지를 논의하는 모습들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11월 초, 한·중·일 정상회담이 서울에서 오랜만에 개최된다. 짐작컨대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와 아베 총리는 자국의 당대 최고 전략가들과 치밀하게 조율된 회담 의제를 갖고 서울 회담장에 임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외교무대에서 우리는 어떠한 국가전략과 지역협력의 메시지를 주변 우방국들에게 전할 것인가. 모처럼 조성된 한·중·일 협력의 역사적 계기를 살려나가기 위해서도 우리의 국가지도자가 동북아 평화협력을 위해 발신해야 할 정책어젠다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략가들과 고민하는 21세기 경연의 장이 있기를 기대한다.

박영준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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