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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남자의 폭식증 … 여자의 거식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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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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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소설가

전설 같은 이야기 하나. 옛날에 음식 먹기를 즐기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앉은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음식을 먹었던지 혼자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사람들이 양팔을 부축해서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보다 강도 높은 전설. 음식 먹기를 즐기던 남자가 식사 도중 정신을 잃었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 병원으로 옮겼는데 의사는 과식이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몸에 음식물이 과잉 공급되자 뇌 기능이 잠시 멎었다는 것. 인체에 그런 기능도 있는가 싶게 허황한 이야기지만, 우리 세대 남자의 실화이다.

 섭식장애의 대표적 증상은 거식증과 폭식증이다. 거식증은 신경성 식욕부진이라고도 명명되는데 의식 차원에서는 비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음식을 거부하거나, 식욕이 생기지 않아 고통받는다. 보통 사춘기에 시작돼 평생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며,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문화와 함께 널리 퍼져 있는 현상이라고 한다. 거식증이 주로 여성에게 나타나는 데 반해 폭식증은 상대적으로 남성에게서 많이 보인다. 사실 폭식증이라는 진단명이 유난스러운 게 아니냐고 반문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는 과음을 동반한 과식 에피소드가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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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 생물학자들은 ‘배고픈 유전자’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인체는 굶주림을 전제로 탄생했고, 우리의 유전자 속에는 식량이 부족하던 시대로부터의 기억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배고픈 유전자는 마음보다 먼저 몸을 움직여 몸이 자동적으로 음식을 흡수하도록 작동시킨다. 유전자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지금 이곳의 우리 기억 속에도 머지않은 과거의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 경험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기억의 힘만으로도 우리는 기절할 때까지 음식을 흡입할 수 있다.

 거식증이든 폭식증이든, 정신분석학에서는 그 증상의 배경에 구강 충동에 대한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한다. 구강기 유아의 마음속에 엄마가 젖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지 않는다고 느끼는 분노와, 젖을 너무 많이 먹어서 엄마를 착취하는 것 아닐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형성된다. 폭식증인 사람이 먹는 행위에 죄의식을 느끼거나, 식사 후 곧바로 음식을 토해내는 것은 구강 충동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생존법이다. 아기의 구강기 불안은 엄마의 양육 태도에 의해 강화되거나 해소된다. 오늘도 어떤 엄마는 아기에게 “네가 엄마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불행한지 아느냐?”는 식으로 말하면서 자녀가 미래에 겪을 섭식장애를 준비해준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