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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이명세 영화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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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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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 황동규(1938~ ), ‘즐거운 편지’ 중에서

오직 사소한 것들만이 인생과 영화를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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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을 꿈꾸며 서울예전에 들어간 1970년대 말. 처음 산 책이 황동규 시집 『삼남에 내리는 눈』이었다. 당시 대학가에선 전봉준을 내세운 ‘삼남에 내리는 눈’이 단연 인기였다. 유신의 암울한 분위기에 잘 맞물렸다. 그러나 정작 나를 사로잡은 건 ‘즐거운 편지’였다. 특히 1연의 ‘오랫동안 전해오던 사소함’이란 구절에 꽂혔다. 영화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기필코 답을 찾고 말리라던 호기로운 내가 뭔가 인생의 화두를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밑줄을 긋고 방점을 찍었다.

 10여 년 후 감독 데뷔를 했고 ‘사소함’은 내 영화의 키워드가 되었다. 데뷔 초 ‘첫사랑’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등을 찍으면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소한 영화를 만들리라 생각했다. 그런 내 영화는 거대 담론이 지배하는 시절 당연히 환영받지 못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동안 나는 ‘한국 영화계에서 사라져야 할 감독 1순위’였다. 그러나 내게 사소함은 일상성이고 디테일이며, 삶의 엑기스이자, 미학의 본질이고, 우주다. 모래 알갱이 안에 전 우주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요즘도 틈틈이 되뇌는, 내 삶과 영화의 화두 같은 시다.

이명세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