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머 난무한 루이 16세 시대, 군중심리 촉발해 몰락 가속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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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호 28면

1 1789년 10월 6일 베르사유궁전에 난입한 군중이 시신 일부를 창검에 걸고 행진하고 있다.

지금부터 꼭 226년 전인 1789년 10월 5일, 근대적 의미의 대규모 여성 시위가 최초로 등장했다. 당시 프랑스는 흉작에다 사회 불안정까지 겹쳐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 민중의 고통에 아랑곳없이 10월 1일 열린 호사로운 베르사유궁전 파티에서 만취한 궁전 근위병들이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삼색 장식을 던져 밟고 방뇨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높은 물가와 빵 부족 사태로 어려움을 겪던 파리의 수천 명 여성들이 이에 격앙해서 베르사유까지 장장 6시간을 행진한 것이다.


시위대는 창검뿐 아니라 대포도 끌고 갔다. 포탄 없는 대포였기 때문에 시위 목적이 강했다. 물론 시위대 뒤에는 수만 명의 민병대가 있어 언제든지 폭동으로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실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시위대 대표를 만난 루이 16세는 왕실 창고의 식량을 분배해주기로 약속했고 일부 시위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수의 시위 참가자들은 왕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런 약속을 무효화할 것이라고 믿고 왕과의 만남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베르사유궁전에 잠입한 시위대 한 사람이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된 궁전 근위대의 발포로 사망하자 시위대 다수가 궁전에 난입했다. 난입한 자들은 근위병들을 살해하고 그 시신을 도려내어 창끝에 효시하는 광기의 모습을 보였다. 이런 위협적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왕실과 의회는 다시 파리로 옮겼다. 루이 16세 부부는 3~4년의 유폐 기간을 거친 후 1793년 1월과 10월에 각기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2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 장면.게오르크 하인리히 시베킹의 동판화.

근대적 의미의 첫 대규모 여성 시위베르사유 시위는 이미 잠재적으로 평민 쪽에 기울어진 권력의 무게중심을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이리하여 베르사유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은 ‘국민 엄마’라는 별칭을 얻었다.


시위는 불만의 집단적 표출이다. 베르사유 시위 직전에는 귀족들이 빵 값을 높게 받기 위해 일부러 빵 공급을 줄인다는 음모설이 파다했다. 빵 부족과 물가 폭등이 가뭄 등에 의한 천재(天災)가 아니라,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에 의한 인재(人災)로 본 것이었다.


각종 매스컴이 발달한 오늘날과 달리 사실 확인이 쉽지 않은 시절에는 한번 퍼진 소문이 그냥 하나의 사실로 대중에게 각인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간단한 문구로 표현되는 내용이 더 그랬다. 당시 왕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말했다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될 것 아니냐”는 구절은 군중을 격앙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가 실제 그런 말을 했다는 근거는 없다. 어떤 왕후가 그런 말을 했다는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 구절이 그 근거로 주장되기도 한다. 그런데 『고백록』저술 시점의 마리 앙투아네트 나이가 10대 초반이었고 더구나 그가 프랑스로 오기 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루소가 말한 왕후가 마리 앙투아네트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빵 대신 케이크’ 발언 외에도 보석과 섹스 등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소문이 많았다. 주로 왕후가 민중의 궁핍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에 빠져있음을 비치는 내용이었는데, 소문 다수는 지어낸 말에 불과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런 말이나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철없고 사치스럽다는 이미지는 이미 프랑스 국민에게 박혀있었다. 그가 프랑스와 오랜 세월 경쟁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족이라는 사실 또한 그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반감을 높였다. 각기 다른 이유로 루이 16세 체제를 싫어하던 세력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말을 재생산하고 전파했다.

3 1789년 10월 5일 베르사유로 행진하는 파리 여성들. 창검, 빈 대포, 부르주아 복장의 여성, 남성으로 의심되는 참가자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마녀사냥식 한풀이 굿으로 카타르시스


‘아니면 말고’ 식의 중상모략에 대한 응징은 공권력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다. 오히려 마녀사냥식의 한풀이 굿으로 진행돼 일부 군중은 그런 소문이 중상모략일 가능성을 인지하면서도 마녀사냥에 동참해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즐기려 했다. 루이 16세 부부는 민중과 소통을 했어야 했는데, 불신과 불통이 정권과 목숨을 앗아갈 줄 몰랐었는지 과감한 개혁을 시도조차 못했다.


베르사유 시위는 루이 16세의 사촌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2세가 왕위 찬탈을 노려 기획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를레앙 공작은 입헌군주제가 채택된다면 국왕으로 취임할 유력한 후보였다. 그는 왕정 시기 내내 루이 16세의 견제를 받다가 루이 16세가 처형된 해 11월에는 자신도 처형되고 말았다. 오를레앙 공작이 얻은 게 없기 때문에 그의 개입은 없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기획했다가 실패한 음모도 많다.


베르사유 시위는 루이 16세 체제의 붕괴를 원했던 여러 행위자가 직간접으로 개입해 시작됐고 또 그렇게 전개된 것이다. 베르사유 시위대에는 반(半)강제적으로 참가한 부르주아 여성 그리고 여장을 하고 참가한 남성도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베르사유궁전 점거 아이디어는 시위 발생 이전에 이미 공공연하게 거론되고 있었다. 누가 어느 수준의 시나리오를 갖고 베르사유 시위를 추진하고 전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주요 인물들이 각자의 손익계산을 해가면서 베르사유 시위를 유도 혹은 방치하였음은 분명하다.


  제거할 킹핀 지목해 변화 이끄는 선동오늘날 선동정치가를 의미하는 ‘데마고그’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시작한다. ‘평민의 지도자’라는 뜻의 긍정적 의미로 시작한 용어였다. 고대 그리스는 급진적 변화 대신에 숙의를 통해 정책 변화를 도모하던 체제였다. 따라서 급격한 신분상승이 어려웠던 하층계급 출신 데마고그는 즉각적인 집단행동을 유도하기 위해 감정에 호소했다. 이성으로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행동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반면, 감정은 바로 행동화되기 때문이다. 감정에 호소하다 보면 과장하기 마련이었다. 이에 따라 데마고그의 뉘앙스도 점차 부정적으로 바뀌게 됐다.


선동이라는 어원도 마찬가지다. 선동은 남을 부추겨 움직이게 하는 행위다. 선동가의 입장에서는 잘못을 알려 남들을 옳은 방향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정당한 행위다. 강물이 좁아지는 곳에서 통나무들이 서로 뒤엉켜 더 이상 하류로 내려가지 못할 때 어느 특정 통나무를 제거하면 전체가 잘 흘러간다. 이 통나무를 킹핀이라 부른다. 볼링에서 잘 맞추면 모든 핀을 쓰러뜨릴 가능성이 큰 한가운데의 핀 또한 킹핀으로 불린다. 선동은 제거할 킹핀을 지목해 변화를 이끈다는 의미에서 전략적 행위다.


선동가들은 절차적 진실성보다 실질적 변화로 자신의 거짓 행위를 정당화한다. 진실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세상을 바꿀 다수의 힘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진실왜곡을 감수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약간의 거짓을 수용한 세상 바꾸기 점화가 과연 누구를 위한 세상 바꾸기인지가 의문일 때가 많다. 만일 선동이 올바른 사실을 전달해 체제를 바로잡는 것이라면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거짓 정보로 선동할 때가 적지 않기 때문에 선동 또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감정에 기초한 행동에 대해 후회할 때가 있듯이 이성과 지성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집단행동은 여러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거짓에 의한 선동이 세상을 바꾸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 선동가는 결국 응징을 받았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떨쳤던 선동정치가도 거짓이 드러남에 따라 그 대가를 치렀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거짓이 탄로날 때 그 거짓을 폭로하는 상대를 선동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상대의 폭로를 선동으로 규정할 때에도 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결국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된다.


 대규모 집단행동엔 대의명분이 필수적집단행동이 늘 쉬운 것은 아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행위에 비유된다. 쥐들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게 되면 고양이의 접근을 미리 알게 돼 좋아하겠지만, 목숨 걸고 방울 달려는 쥐는 별로 없다. 이것이 바로 집단행동의 어려움이다. 민주화라는 혜택은 민주주의 쟁취에 기여한 사람이나 기여하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향유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 무임승차하려고 하고, 따라서 공공적 집단행동이 어렵다는 것이다.


집단행동은 불참자가 누릴 수 없는 잿밥이나 콩고물 등 사적 혜택을 참가자에게 제공할 때 더 용이하다. 그런 사적 혜택의 제공은 집단행동의 공공성이 약할 때 가능하다. 역설적으로 공권력의 공공성이 약한 사회일수록 집단행동의 참가자를 규합하기가 쉽다. 정치권의 줄서기와 패거리가 흥행할수록 정치권력의 공공성이 약하다는 반증이다. 문제는 대규모 시위의 참가자 모두에게 사적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세상을 바꿀 대규모 집단행동에는 적어도 참가자 모두가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공공재적 대의명분이 필수적이다.


오늘날은 시위에 참여한다고 해서 부담해야 할 희생이 크지 않다. 사실 226년 전 베르사유 시위도 참가 자체에 위험 부담이 컸던 것은 아니다. 이미 반(反)왕정이 대세였다. 오히려 친(親)왕정의 행동에 훨씬 큰 대가가 뒤따랐다. 대세를 간파하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스위스 출신 근위병들이 그런 예다.


 진실에 불편 느끼는 군중심리의 양면성군중 심리는 양면적이다. 먼저 다수에 동조하여 심리적 안정을 꾀한다. 이미 그렇게 믿고 많은 말과 행동을 해왔던 군중은 새로운 진실에 불편해할 수 있다. 그래서 진실보다 다수의 믿음에 따르기도 한다. 여러 사회실험은 본인이 직접 목도한 사실조차 주변 다수의 의견에 따라 부인함을 보여준다. 남과 다른 믿음을 가져 심리적 갈등을 겪기보다는 남과 같은 믿음을 가져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다. 더구나 진위에 대한 복잡한 분석 대신에 다수의 믿음을 그냥 따르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교차로에서 행인과 운전자가 직접 신호등을 보지 않고 다른 행인과 차량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그런 예다.


군중은 다수에 대한 동조뿐 아니라 남과 다르다는 선별적 자존감도 추구한다. 시위 참가자는 불참자에 비해 소수라는 맥락에서 선별적이고 선구적인 행위자다. 대의명분이 있는 시위에의 참가는 선별적 자부심을 제공한다. 이처럼 대세를 따르되 남을 선도하려는 성향은 시위 동원 기법뿐 아니라 줄 세우기 마케팅 기법에서 활용되는 주요 요소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시위적 현상은 흔해졌다. 특히 온라인에서 더욱 그렇다. 베르사유궁전이 아닌 청와대로 행진하려는 시위도 종종 시도된다. 순수한 마음으로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 또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 또 정치적 동기에 의한 순수하지 않은 시위라고 역공하는 사람 등 다양한 입장과 행동이 존재한다. 세상은 길게 보면 순간적 감정보다 합리적 이성이 이끄는 쪽으로 변화해왔음을 숙지해야 한다.


김재한한림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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