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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헌신적인 남자, 이기적인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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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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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소설가

연애 기간에 그는 자상하고 헌신적인 남자였다. 여자의 요청을 거절한 적이 없었고, 표현하지 않은 욕구까지 미리 알아차려 충족시켜 주었다. 연애 기간에 목소리를 높인 적도 없었다. 결혼 후 그는 정반대 인격이 되었다. 자주 아내에게 불평불만을 터뜨렸고, 한번 화나면 제동장치가 고장 난 듯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자들이 연인을 구할 때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배려심 많고 헌신적인 남자를 찾는 것이다. 그런 남자는 소설과 드라마 속 환상으로 존재하지만 간혹 현실에서 환상을 충족시키는 남자가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매사에 헌신적인 남자는 위험하다. 그는 좋은 것들은 모두 외부에서 온다고 믿을 가능성이 높다. 사랑과 돌봄은 여자에게서, 인정과 지지는 부모에게서, 업무상 성취감은 상사에게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타인에게 헌신할 때마다 그들의 무의식에는 보상받고자 하는 욕구가 차곡차곡 쌓여 간다. 받는 것에만 익숙해진 상대에게 실망하고, 보상받지 못한 헌신에 대해 분노하게 될 때까지. 한순간 그는 다른 인격처럼 돌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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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나 청년기 남자가 이기적인 것은 당연하다. 자기 욕구를 알아차리고 보살필 줄 안다는 의미이며 외부의 것을 받아들여 자기를 만들어 가는 중이라는 뜻이다. 그 시기에는 헌신적인 남자가 오히려 위험하다. 그는 자기 욕구를 스스로 돌본 적도, 자신을 사랑해본 적도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두 종류의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후배에게 가끔 말해준다. 헌신적인 남자보다 이기적인 남자가 더 좋은 연애 상대라고.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과 서로 존중하는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단 조건이 붙는다. 서른다섯 살 이전까지만. 중년기 이후에는 이기적인 남자가 위험한 존재가 된다. 결혼 후 자녀를 갖게 되면 아무리 이기적인 남자도 책임감을 느끼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한다. 가장이 돼서도 시간과 돈을 자기 만족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는 가족에게 재앙이 되는 존재다.

이기적인 남자도, 이타적인 남자도 사실은 다 괜찮다. 그들은 복잡 미묘한 감정의 줄타기를 하면서 사랑을 얻고자, 관계를 맺고자 애쓰는 이들이다. 진짜로 위험한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여자와 관계 맺기 위해 번거롭게 감정의 줄타기를 하기보다는 돈과 권력을 이용해 여자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쪽이 쉽고 안전하다고 여긴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