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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력만으론 안 돼 … 직원들 마음 잡아야 1+1=10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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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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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회장

지난 16일 일본 동부 요코하마(橫濱)시의 파시피코 요코하마 국립대홀.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83) 교세라그룹 명예회장이 행사장에 들어섰다. 그가 젊은 기업인에게 경영철학을 전파하기 위해 만든 ‘세이와주쿠(盛和塾)’ 모임의 세계 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글로벌 혁신 기업인, 미래 50년을 말하다 <2> 이나모리 교세라 명예회장
손정의도 배운 이나모리 명예회장의 ‘필로소피 경영법’
“내가 속이면 자네들 손에 죽겠다”
창업 초기 임금갈등 사흘 밤낮 설득
“직원과 함께 번영해야 회사 존재?

 이나모리 회장은 “벤처 기업을 세운 뒤 재치와 능력이 있고 기지를 발휘하면 10년이나 20년은 회사를 발전시키고 존속시킬 수 있다”고 운을 뗐다. 하지만 “원초적 경영철학이 몸에 배지 않으면 결코 번영을 지속할 수 없다”며 그의 ‘필로소피(philosophy·철학) 경영’을 설파했다.

 미국식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첨단 경영학 지식과 신기술만으로는 수십~수백 년 가는 ‘일류 장수 기업’을 만들 수 없다는 ‘미래 사장학(社長學)’을 역설한 것이다. 이날 대회엔 미국·중국·브라질 등에서 4600명의 경영인이 모여 들었다.

 이틀 뒤인 18일 서부 간사이(關西) 지방의 교토(京都) 본사 19층에서 이나모리 회장을 따로 만났다. 그는 “요즘 가장 열성을 다하는 일이 바로 세이와주쿠 모임에서 중소기업 경영인들에게 경영 방침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를 짊어질 더 많은 ‘필로소피 경영인 군단’을 배출하겠다는 취지다. 그는 “단지 경영 공부뿐 아니라 회식 자리까지 마련해 4600명이 함께 치열하게 의견을 나눴다”고 했다.

 교세라 필로소피는 ▶개별 직원의 경영자화(化) ▶직원의 기(氣)를 북돋는 7개 열쇠 ▶노력·반성·감성 등 인생과 일에서 추구할 6개의 정진(精進) 대상 ▶목표의식·투혼을 포함한 경영 12개 조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그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경영 테크닉’을 지닌 경영자들이 ‘어떻게 하면 회사가 이윤을 얻을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모든 일을 생각해 나간다”며 “이런 배경 속에서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기술을 이용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나모리 회장이 ‘필로소피 경영’에 천착한 결정적 계기는 반세기 전 깨달음 때문이었다. 기술 하나만 믿고 교토세라믹을 창업한 지 3년째인 1961년 봄. 당시 29세의 이나모리에게 고졸 사원 11명이 정기 승진, 보너스를 요구하며 단체협상을 제의했다. 당시 이나모리 사장은 “회사가 성장하면 열매를 나누자”고 달랬지만 소용 없었다. 결국 사흘 밤낮을 대화한 끝에 “약속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 내가 속인다면 자네들 손에 죽겠다”고 말해 설득에 성공했다.

 이때 그는 기술력만으론 좋은 기업을 만들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직원과 함께 번영해야 회사도 존재한다”는 철학을 가슴에 새긴 것이다. 이나모리 회장은 기자에게 “이런 신조는 수십 년 뒤에도 통용되는 경영 원리”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물론 경영에는 전술·전략 같은 기술적 노하우도 필요하다”며 “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으로서 올바른 것이 뭔지 철학적 성찰이 전제돼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도리를 지키지 않으면 결국 ‘경영 기술’을 남용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젊은 경영인은 현재 9000명에 이른다. 모두 세이와주쿠 모임 회원이다. 정보기술(IT) 업계의 거물인 손정의(58) 소프트뱅크 회장도 그에게 한 수 배우려 했을 정도다. 손 회장은 83년 모임이 설립된 뒤 초기 멤버였다.

 이나모리 회장은 “필로소피 경영을 실천하려면 ‘혈육화(血肉化)’하라”는 주문도 했다. 그는 “지식으로 외우는 게 아니라 육체에 스며들게 만들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미국식 ‘이윤 중심’ 경영을 비판하고 ‘필로소피 경영’의 시대가 온다고 예견한다고 해서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이나모리 회장은 “사원을 행복하게 만들고, 사회에 공헌하려고 해도 실적과 이익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고매한 목표를 실현할 수 없다”고 밝혔다.

 실제로 ‘교세라 필로소피’엔 구체적인 경영 지침도 많다. ‘경영은 매출을 키우고, 경비를 줄이는 것”이라는 지침을 포함한 ‘이나모리의 7대 회계학’ 원칙이 그렇다. 전표·입금 처리는 두 명 이상이 점검해 투명성을 높이고, 필요 없는 자산(군살)을 없애는 근육질 경영도 마찬가지다. 그가 제시한 원칙 중에 “벡터(vector·힘의 방향)를 맞추라”는 것도 있다. 벡터가 나뉘면 회사 전체의 힘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원이 같은 방향으로 결집하면 ‘1+1=10’을 만든다”고 했다. 경영진·종업원이 한 묶음으로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는 59년 창업 직후 TV·라디오 제품을 본 뒤 ‘전자시대(電子時代)’가 올 것으로 예견하고 교토세라믹을 창업해 큰 성공을 거뒀다.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이나모리 회장은 “미리 예측해 거둔 성과가 아니다. 엄청난 천재가 아니면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선 ‘자벌레’이론을 꺼냈다. 그는 “자벌레처럼 지금 일을 한 걸음 한 걸음씩 충실히 나아갈 때 비로소 자연스럽게 앞이 보인다”고 말했다. 이나모리 회장은 인터뷰 말미에 미래든 현재든 결국엔 ‘사람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나는 가고시마 시골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부유하지도 않았다. 일류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았다. 평범한 나는 사회에 나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여기까지 왔다.”

교토(일본)=김준술 기자 jso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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