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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녀에서 맘충까지 … ‘3포 세대’의 그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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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하는 여성 혐오

엄마를 벌레에 빗대 조롱하는 ‘맘충’이라는 단어가 온라인을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다. [일러스트=송혜영 기자]

‘mom+벌레 충’ 성역이던 모성까지 공격
일부 이기심 지칭이 전체 조롱하는 말로
불특정 여성에 대한 증오범죄 가능성도

며칠 전 여섯 살 딸과 함께 카페에 갔던 김희진(35)씨는 카페에 있던 20대 여성들이 자신을 ‘맘충’이라고 부르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 맘충은 엄마를 뜻하는 맘(mom)과 벌레 충(蟲)자를 붙인 신조어다. 김씨는 “아이가 시끄럽게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이와 함께 카페에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를 맘충이라고 부르다니 당황해서 바로 카페를 나왔다”고 말했다.

“화가 나는 걸 넘어 마음이 아프다”

일부 이기적인 젊은 엄마를 지칭하던 이 말이 아이를 둔 엄마의 존재 자체를 조롱하는 말로 확산하고 있다. 김여사(운전이 서툰 여성)·김치녀(남자한테 돈만 뜯어내는 여성)·된장녀(허영심에 차 사치를 일삼는 여성) 등에 이어 이번엔 아이를 둔 엄마의 모성애까지 여성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이다.

 ‘자기 자식은 뭘 하는지 안중에도 없이 방치하면서 모성은 무슨. 맘충이지’ ‘출산이 벼슬이라도 되는 듯 유세 떠는 김치녀가 진화한 게 맘충이다’는 등의 말이 온라인에서 오간다.

 카페에서 컵에 아이 소변을 받거나, 테이블 위에 오염된 기저귀를 버리고 가거나, 아이들이 뛰어다니도록 놔두는 엄마들에 대한 비난은 전부터 있었다. 이 때문에 초등학생 이하의 출입을 금지하는 노키즈 카페나 식당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의 맘충은 특정 행태에 대한 비난을 넘어 어린아이를 가진 엄마 전부를 벌레에 비유하며 공격한다. 4세 아들을 둔 주부 진수연(37)씨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엄마들이 있는 건 맞지만 일부의 얘기다. 아이를 아끼는 엄마를 벌레로 표현한 것을 보니 화가 나는 것을 넘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맘충이라는 말이 널리 퍼진 건 MBC 예능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 계기였다. 네티즌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이 프로그램의 대화창에 ‘**맘’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여성들이 ‘내 아이 이름을 불러달라’고 요구하다가 백씨가 이에 응하지 않자 ‘소통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했고, 이 때문에 다른 이용자들의 불만을 샀다.

이슈가 된다, 기업 광고에도 등장

여성 혐오는 기업의 마케팅 수단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최근 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회사는 헤어진 남자친구가 국가고시 1차 시험에 붙자 연락한 여성의 경우를 설정해 페이스북 광고에 이용했다. 광고 속 여성은 대화창에 ‘뭘 내가 뽑아먹어. 난 단지 기념일에 잊지 않고 선물해달라고 그거 요구한 것밖에 없거든?’ 이라고 말한다.

 2012년 한 화장품 회사는 인터넷 광고에 ‘명품 가방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남자친구를 사귀어 선물을 받는 것’이라며 여성 비하적인 문구로 논란이 됐다. 한 차(茶) 브랜드는 지하철 광고에 생일을 앞둔 여성이 남자친구와의 이별 후 심정을 “신상으로 가득 채워 놓은 내 위시리스트는 어떡하니? 블랙 밀크티! 텅 빈 내 마음을 채워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범상규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여성 혐오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이뤄지며 이런 광고는 온라인의 주요 이용자인 20~30대가 선호하는 직설적인 코드와 일치한다. 특히 광고는 이슈가 되는 걸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여성 혐오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여성 혐오 현상에 대해 가부장적 가치관에 익숙했던 한국사회가 늘어나는 여성의 사회 진출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분석한다. 이는 극심한 취업난과 맞물리면서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이른바 ‘3포 세대’의 남성들에게 더욱 두드러진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안정된 직장을 가지기 어렵다고 느끼는 남성들에게 가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여성의 파워는 자신을 위협하고 내 자리까지 차지할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고 설명했다.

여성 래퍼가 여성 비하하는 노래

여성 혐오 현상이 확산하는 가운데 여성 자신이 다른 여성을 비하하는 경우도 등장하고 있다. 지난달 여성 래퍼 제이스가 발표한 노래 ‘성에 안차’는 ‘같은 여자인 나 역하니까. 빛나는 구두 위해 빛나는 네 카드 영수증. 높아진 콧대 그냥 뻔하지. 너에게 연애는 만남이 아닌 거래 밑 빠진 독에 물 부어줄 남자를 찾지’라는 가사로 논란을 빚었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여성과 자신을 구별하는 내용이다.

전문가들은 여성 혐오(여혐)가 늘어나면서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소통이 단절된 사회일수록 분노 조절이 안 되는 사람들이 늘고 여혐처럼 특정 집단에 대한 분노는 혐오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증오범죄가 발생하는 5단계를 부정적인 발언- 회피-차별- 물리적 공격- 몰살 주장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극우 인터넷 사이트인 ‘일간베스트’가 처음 등장했을 땐 다들 별로 걱정할 게 아니라고 했지만 실제 사제폭탄을 만들어 테러하거나 세월호 희생자를 비하하는 등 범죄로 이어졌다”며 “분노 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 늘어나면 약자를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가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글=송정 기자 song.jeong@joongang.co.kr
일러스트=송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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