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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를 일깨워준 어느 환자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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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동규
서울대 의대 교수
신경외과학

시장에는 소비자와 공급자가 있다. 의료시장에서는 소비자가 환자고 공급자는 병원과 의사다. 하지만 의료는 나름의 특징이 있다. 전통적으로 의술은 인술이라고 하여 일반 상거래와 거리를 두었다. 또한 환자는 내용을 잘 모르는 채 거래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의사와 병원은 수퍼 갑이고 환자는 을 중의 을이었던 게 사실이다.

 최근 들어 의술이 인술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희석되었고, 의사와 환자의 불평등 거래도 많이 줄어들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약 11년 전 30대 중반의 남자가 뇌종양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보호자에게 검사내용과 영상기록 등을 보여주며 수술 과정과 혹시 모를 위험성을 설명했다. 질문과 대답이 이어진 후 수술동의서를 작성했다. 환자는 “모든 것을 의사 선생님께 맡기겠다”며 죄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다음 날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환자는 빙긋이 웃으며 자신이 집필한 책 한 권을 선물했다. 환자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과 선한 얼굴이 기억에 뚜렷이 남았다.

 수술 후 환자는 방사선치료와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글을 쓰며 정상적인 활동을 했다. 하지만 혼신을 다한 투병에도 재발 끝에 약 7년 후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했다.

 어느 날 아침 신문의 조그만 사진에서 다시 1년여 만에 그를 만났다. 기사는 젊은 나이로 스러져간 촉망받던 출판 평론가의 1주기 기념사업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선물로 준 책을 다시 꺼내 보았다. 그 속에 뇌종양 진단 후 두렵고 힘들었던 심정을 쓴 글이 주치의였던 나의 가슴을 때렸다. 이혼해 달라는 아내의 말에 몹시 두려웠으나 깨어보니 꿈임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이야기, 수술을 택한 아빠의 결정을 딸이 지지해 주길 바라는 마음 등에 코끝이 찡했다.

 수술 전 아내에게 전한 편지에 “혹여 내가 반편이 되더라도 버리지 말고 잘 돌봐주게”라고 썼고, 딸에게는 “오른팔에 힘이 남아 있을 때 번쩍 안아주고 싶다. 너를 사랑해”라고 적었다.

 대개 의사는 청진기와 메스로 상징되지만 의사가 하는 일 중엔 글쓰기도 있다. 특히 수술같이 중요한 의료행위는 꼼꼼하게 문서로 작성한다. 동의서는 법적 갈등이 발생했을 때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에 의사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뇌수술의 경우라면 반신불수 혹은 식물인간이 되거나 사망할 가능성도 빼놓을 수 없는 내용이다.

 의사는 갑의 입장에서 냉정하고 사무적으로 설명할 때가 많고 환자는 을의 입장에서 얼떨결에 동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환자의 머릿속이 평온할 리 없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 자칫 잘못되면 가족들은 어떻게 살지 등의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보통사람은 표현하기 어려운 수술을 앞둔 환자의 힘든 마음을 그 평론가의 책을 통해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병과 수술에 대한 딱딱한 설명이 그토록 환자를 압박했다니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설명을 안 하거나 무미건조한 동의서를 받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환자의 처지와 심정을 헤아리는 의사의 따뜻한 마음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두 달 전 다시 한 번 신문에서 그 환자 가족들의 소식을 접했다. 잘 정돈된 고인의 서재에서 은은한 미소를 띤 그의 아내와 아들의 사진도 함께 실렸다. 남은 세 식구가 함께 쓴 수필집 『아빠의 서재』를 소개하는 기사였다.

 딸의 글 일부다. “엄마가 아빠처럼 우리만 두고 훌쩍 사라져 버릴까 봐, 아직도 나는 무섭다. 가끔 아빠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아이를 보면 울컥 올라온다…. 살짝 말을 걸어 보고 싶기도 하다. 아빠한테 말하듯이,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견디기 힘든 난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남편과 아빠를 생각하며 밝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했다.

 최근 사회갈등과 함께 의료분쟁도 증가하고 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의사가 환자를 사랑으로 감싸는 마음이 점점 줄어드는 것도 원인이 아닐까 싶다. 예로부터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라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의사가 좋은 의사라 했다.

김동규 서울대 의대 교수·신경외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