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치명적 무기, 음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전쟁에 문외한인 내가 남북의 아슬아슬한 대치를 통해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놀랍게도 확성기가 매우 중요한 무기라는 것이다. 그것도 북한이 전시동원체제를 선포할 만큼. 북한은 확성기를 왜 그토록 두려워한 것일까. 혹시 체제에 대한 비판보다 남한의 음악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리 젊은이들의 음악을 듣다 보면 전쟁이 아니라 사랑에 주목하게 될 터이니 말이다. 아이유의 ‘마음’을 듣고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을 청년이 있을까. 빅뱅의 노래처럼 “꼼짝 마, 빵야빵야”를 외쳐야 할 대상은 같은 민족이 아니라 사랑이다. 소녀시대는 대형 전광판이라도 설치해 뮤직비디오로 보여주었으면 더 좋았을 정도다.

 인류가 음악을 전쟁에 사용한 역사는 의외로 매우 길다. 이미 로마 시대부터 트럼펫은 군인들과 함께 전쟁터에 나가기 시작했다. 트럼펫의 낭랑한 울림은 숨 막히는 전쟁의 긴장감을 풀어주고 사기를 높여주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전장을 뒤흔드는 트럼펫 소리 앞에서 적들은 두려움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6세기부터는 트럼펫뿐 아니라 북까지 가세해 트럼펫-양철북을 축으로 하는 앙상블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바로 군악대의 시작이다. 군악대는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일뿐 아니라 무전기가 없던 시절 군대의 명령 신호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도 담당했다.

 전쟁 영웅 나폴레옹은 전략·전술뿐 아니라 음악을 통한 심리전에도 능했다. 혹독한 전장에서 위용을 떨쳤던 나폴레옹 군대의 충성심은 선동적인 군가에서 나왔다. 나폴레옹이 진군하면서 나지막하게 군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하면 누군가가 따라 부르고 곧 전군이 합창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후퇴를 모르는 강인한 군인이 되었다. ‘라 마르세예즈’는 나폴레옹 군대가 애창했던 대표적인 군가다. “무기를 들어라/ 진열을 갖추고 진격하자/ 적들의 불결한 피를 들판에 강물처럼 흐르게 하자.” 이 잔인한 가사가 그대로 통용되는 게 믿기지 않지만 지금도 이 노래는 프랑스의 엄연한 국가다.

 음악이 무기라는 점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여실히 증명된다. 교전국들은 상대방 국가를 대상으로 적극적인 심리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집과 고향을 떠나 전장에 나와 있는 군인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악은 이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중요한 무기였다. 여기에 여성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반전 호소가 더해지면 그 효과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해졌다.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선무방송가 이바 도구리. ‘도쿄 로즈’로 알려졌던 그녀는 태평양 전선에 있었던 미군에게 치명적인 무기였다. 베트남전의 ‘하노이 한나’도 향수 어린 음악을 배경으로 미군들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었다. 하기야 역발산기개세를 자랑하던 초패왕 항우의 용맹한 부하들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랫소리에 전의를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음악을 무기로 보는 것은 비단 군사 전략가들만은 아닌 듯하다. 최근 K팝에 관한 글들을 보면 이를 무기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자는 주장과 기대로 가득하다. 그러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100년 이상 대중문화의 변방 국가로 일본과 미국을 따라가기만 하다가 드디어 선도하는 위치에 섰으니 말이다.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가 우리의 노래와 춤을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자랑스럽다고 해도 K팝에 투영된 지나친 국가주의는 어색하고 어딘가 위험해 보인다. K팝은 미국과 유럽의 일렉트로닉 팝에 기초하고 있으니 음악적으로 한국 문화의 특별한 정체성을 주장하기 어렵다. 우리만의 새로운 팝을 해서가 아니라 유행하고 있는 팝을 잘하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K팝이 진정한 무기가 되려면 변화가 필요하다. 노래와 춤은 물론 패션, 메이크업, 헤어스타일까지 모든 것을 기획사가 정해주는 시스템에서는 창의력이 설 자리가 없다. 아이돌은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소모품일 뿐이니까. 치밀한 기획 시스템에 우리만의 콘텐트가 담겨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래야 최고가 될 수 있다. 음악의 파워는 볼거리가 아니라 내용에서 나오는 법. 세계가 K팝을 진정으로 두려워할 날을 고대한다.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