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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에 시작 한 공부 … “손주 이름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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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서귀포 오석학교의 여울반(문해 3단계) 수업에서 허진선(오른쪽) 선생님이 이 학교 최고령 여학생인 오계순(왼쪽)씨에게 동시 쓰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딸보다 어린 선생님의 지도를 받은 오씨는 삐뚤빼뚤한 글씨지만 최선을 다해 동시를 공책에 옮겨 적었다. 오씨는 6년째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 [최충일 기자]

지난 1일 오후 7시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포 오석학교 앞 마당. 입학식을 앞둔 주민 100여 명이 삼삼오오 들어섰다. 머리가 희끗한 아주머니와 할머니들 사이로 중년 남성들과 중고생 또래의 학생들도 보였다. 모두 각오가 가득한 표정이다. “글을 배우고 싶다” “검정고시를 보겠다”며 학교의 문턱을 넘는 데 적지 않은 용기를 낸 이들이다.

 평생학습시설인 이 학교는 1967년 세워진 재건학교가 전신이다. 당시 남제주군 농협회관과 중앙유치원 건물을 빌려 교실로 썼다. 74년 현재 위치인 서귀포시 중동로 727여㎡ 부지로 옮긴 뒤 86년 서귀포 오석학교로 개명했다. 예전엔 검정고시를 보기 위한 야학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글을 배우지 못한 주민들을 위한 교육이 주를 이루고 검정고시 교육도 병행한다. 인구 15만7000여 명의 소도시에서 배움에 목마른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이 학교는 48년간 14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입학식을 마치고 오후 8시가 되자 초등학교 5~6학년 수준의 국어를 배우는 여울반(문해 3단계) 수업이 시작됐다. 오늘은 직유법을 배우는 시간. 수업을 맡은 허진선(43) 선생님의 선창에 “~같이” “~처럼”을 함께 읽으며 글로 써본다. 여학생 중 최고령인 오계순(80)씨도 딸보다 어린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크게 외친다. 삐뚤빼뚤 완전하지 못한 글씨체지만 최선을 다해 공책에 옮겨 적기도 한다.

 오씨는 6년 전만 해도 완전히 까막눈이었다. 새날반(문해 1단계)으로 시작해 이제는 장문의 글짓기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오씨는 “손자 이름 세 글자를 내 손으로 쓸 수 있게 됐을 때 가장 기뻤다”며 미소를 지었다. 문해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고개를 돌릴 때마다 간판과 표지판의 한글이 읽히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고 입을 모은다. 노래방이 즐거워진다는 점도 큰 보람이다. 자막을 따라 리듬에 맞춰 열창하는 건 글을 몰랐을 때는 결코 누리지 못했던 즐거움이다.

 강복화(64)씨는 문해반을 졸업하면 검정고시반에 들어갈 계획이다. 고교 검정고시 합격을 목표로 잡았다. “5년 전 두 차례나 이 곳을 찾았지만 세 번째로 와서야 용기를 내 입학원서를 냈다”는 그는 “가족처럼 대해주는 선생님들과 응원해주는 동료 학생들이 있어 합격에 자신 있다”고 말했다.

 검정고시반에는 한 어린 학생이 눈에 띈다. 처음엔 자원봉사를 나온 청소년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10대 중국동포 학생이다. 중국 저장성(浙江省)에서 중학교 3학년까지 살다가 서귀포시 고모집으로 유학 온 강용(17)군이다. 강군은 올해 한국 중학교 검정고시에 도전한다. 그는 “한국에 빨리 적응해 두 나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간식은 학교의 분위기를 띄우는 데 한몫한다. 50~80대 아주머니·할머니 학생들이 돌아가며 매일 풍성한 먹거리를 가져온다. 수업료가 무료라 그렇게라도 보답하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날엔 수박이 먹기 좋게 썰어져 나왔다.

 이들에겐 교우관계나 학교생활 자체가 큰 기쁨이다. 어렸을 때 다녀보지 못한 학교라서 하나하나가 새롭다. 수업을 앞두고 당번이 일찍 와서 청소를 하고, 학급을 대표하는 반장을 뽑고, 수학여행을 함께 떠나는 등의 체험도 이들에겐 모두 더없이 소중한 일들이다.

 김승남(43) 교무부장은 “ ‘주부 10단’ 어머니들이라 청소에는 다들 베테랑이다. 교실이 늘 번쩍거려 따로 청소할 필요가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현직 국어교사인 양봉관(56) 교장은 “처음엔 주민들에게 뭐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했는데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오히려 더 많은 걸 배우게 돼 행복하다”며 활짝 웃었다.

서귀포=최충일 기자 choi.choo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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