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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다니는 뉴욕 치매환자들 “모든 걸 잃은 게 아니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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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아카펠라 배워 공연하고 서울 영등포 시니어 행복발전센터 회원들이 거리에서 아카펠라 공연을 하고 있다. 센터에 개설된 아카펠라 교실에서 노래하는 법을 배웠다(작은사진). [사진 영등포구 시니어행복발전센터]
사진 배워 전시회 하고 취미로 사진을 배운 회원이 출사를 나가 사진 찍고 있다(위). 단체 사진전에 출품한 박향희씨의 작품 ‘방화대교 야경’.

프랑스 파리 12구의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매년 6월 이곳은 학생들로 북적인다. 초등학생부터 고교생까지 폭도 넓다. 이때만은 오페라극장의 주인공이 학생들이다. 이들이 직접 만든 오페라가 실제 무대 위에 올라가기 때문이다.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은 프랑스에서 최고로 손꼽는 무대다.

 이유가 있다. 학생들은 오페라극장과 학교를 오가며 오페라를 배운다. 파리국립오페라단이 파리 일대 초·중·고교 33곳에서 학생들을 뽑아 2년간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목표는 명확하다. 학생들의 감성이 굳기 전에 예술과 친구가 되게 하는 거다. 극단 관계자는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평소 문화·예술을 접하기 어려운 학생들이 오페라에 관심을 갖게 하려 했다. 예술과 교감하며 그들 속에 잠자는 감성을 깨워주는 게 목표다”고 말했다.

치매 환자들도 예술 즐기고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운영하는 치매 환자 프로그램인 ‘미트 미(Meet Me)’에 참가한 환자와 가족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 MoMA]

 학생들에게는 ‘오페라 극장의 모든 것’을 볼 기회도 주어진다. 무대 뒤의 백스테이지를 비롯해 무대의상을 만드는 작업실, 무용 연습실, 리허설 등 오페라가 제작되는 과정을 일일이 눈으로 감상하고 체험한다. 오페라에 대한 입체적 이해를 위해서다. 프랑스 기업들은 1991년부터 25년째 이 프로그램을 후원하고 있다. 지금까지 거쳐간 학생 수만 1만7000명이다. 극단 측은 “처음 현장에 온 아이들은 오페라를 처음 접하고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고 말했다. 2년이 지나면 ‘낯선 오페라’가 ‘익숙한 오페라’로 바뀐다. 덩달아 학생들의 가슴에서 예술에 대한 감성의 싹이 튼다. 이런 체험은 학생들의 ‘삶의 질’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뿐만 아니라 성인이 된 후에도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토양을 미리 갖추게 된다.

 ‘물질의 복지’는 산업화 시대의 패러다임이다. 이제는 ‘마음의 복지’에도 눈을 돌려야 할 시대다. 그 핵심이 ‘여가 스펙’이다. 문화 선진국에서는 어린 아이들부터 문화·예술을 통한 ‘삶의 여가’를 체험하게 한다. 류정아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문화예술연구실장은 “문화 예술에 대한 체험 기회를 많이 줘야 아이들의 ‘그릇’이 커진다”며 “그릇의 크기가 나중에는 창의성의 크기와 직결된다”고 말했다. 파리오페라단의 프로그램도 아이의 그릇 키우기 일환이기도 하다.

서예 배워 나눔 봉사 하고 동양화 캘리그래피를 배우는 시니어 회원이 붓글씨 연습을 하고 있다(위). 시민들을 대상으로 부채에 캘리그래피를 그려주는 나눔 활동을 한다.

 문화 선진국에서는 몸이 아프다고 문화를, 삶의 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예컨대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2006년부터 치매 환자를 위한 프로그램 ‘미트 미(Meet Me)’를 운영하고 있다. 치매 환자와 보호자가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미술을 관람한다. 워크숍에 참가해 종이나 찰흙으로 직접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치매 아버지를 모시고 온 한 참가자는 “아버지는 더 이상 아프기 전의 모습이 아니지만 미술관에 가면 예전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반응을 하신다”고 말했다. 한 치매 환자는 “그림을 보니 갑자기 예전에 공부한 게 생각났다. 나는 모든 걸 잃은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환자가 병을 앓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환자와 가족에게는 긍정적 효과를 미친다고 본다. 치매에 걸린 것을 알게 된 뒤 공유할 게 별로 없어진 가족들에게 공통의 화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즐거움과 소통의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이웃과 협동농장하며 힐링 베이비부머 세대가 ‘힐링 텃밭 가꾸기’ 수업에 참여해 작물을 가꾼다. 회원들이 스스로 키우고 가꾼 채소를 곁들인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아래).

 진정한 ‘마음의 복지’는 세대 간, 이웃 간 단절을 깨는 데서 출발한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더불어락노인복지관은 낮에는 60대 이상 회원들이 이용하지만 평일 저녁과 주말에는 초등학생과 청소년·직장인들로 북적인다. 2011년 복지관을 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면서 생긴 변화다. 노인들이 이용하는 프로그램은 오후 4시면 끝났다. 3층 건물을 비워놓느니 주민 모두를 위해 내주자는 데 뜻을 모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재능 있는 노인들이 직접 강사가 돼 동네 청소년들을 가르치기로 했다. 토요일에 열리는 초등학생 한문교실은 은퇴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탁구교실은 한약방을 운영하는 어르신이 강사를 맡고 있다. 평일 저녁에 열리는 요가·댄스·우클레레 수업에는 악기를 배우고 싶은 여학생, 댄스를 배우는 직장인이 어르신들과 어울린다. 자주 마주치다 보니 장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1층에 있는 마을 카페는 남녀노소가 한데 어울리는 사랑방이 됐다. 유경숙 사무국장은 “이곳 어르신들은 표정도 밝고 직원들에게도 존댓말을 쓰면서 예의를 갖춰주신다”며 “누군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인식이 변화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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