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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한명숙 선배, 사죄하십시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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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사회생활을 하며 남성들이 부러운 게 있었다. 남자는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인품과 행동거지를 가졌어도 혼자만 욕먹으면 끝난다는 게 그중 하나였다. 여성들은 사소한 실수에도 ‘여자들이란…’으로 시작하는 여성 전체를 향한 비아냥에 직면하곤 했다. 그렇다 보니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들에겐 일종의 강박이 있다. ‘내가 잘못하면 여성 전체가 욕먹는다’.

 이런 강박은 어쩌면 여성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경우 대졸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소위 졸정제(졸업정원제) 학번인 덕에 어찌어찌 신문사에 들어와 보니 내 바로 앞 취재기자 여성 선배와의 격차는 10년이나 벌어져 있었다. 그사이 5공 시절엔 여성들의 사회진출 욕망마저 억압당했던 모양이다. 여성 선배들은 천지분간 못하는 신입에게 “사건기자부터 하라”며 등을 떼밀었고,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네 후배들의 미래가 달렸다”며 담금질했다. 몇 명 안 되는 선배들은 언제나 내 뒤에서 병풍처럼 버텨주었다. 남성이 주류인 사회에, 마이너리티 여성들은 연대감과 책임감으로 뭉쳐 있었다.

 한명숙 전 총리가 구치소에 수감되는 모습을 보며 유달리 착잡했던 건 이렇게 너와 나가 잘 구별되지 않는 여성 연대감 때문이었을 거다. 1990년대 초, 여성단체들을 취재했던 적이 있다. 우리에겐 공백이었던 그 10년 사이의 의욕 넘치고 눈빛 반짝이는 여성들이 그곳에 있었다. 여성들에게 엄혹했던 그 시절, 그들이 여성의 사회적 권리를 찾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하는지 보았다. 한 전 총리는 그런 여성계 리더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워낙 쟁쟁한 선배가 많았던 터라 선두주자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당신은 기성정치권으로 진출해 우리나라 첫 여성 총리가 됐고, 그렇게 여성계의 대표성을 지닌 인물이 되었다.

 5년 전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당신이 기소됐을 때, 내 여성 선배들은 적잖이 당황했었다. 1억원짜리 수표가 여동생 전세금으로 사용됐다는 증거 앞에선 할 말을 잃었다. 여성들에겐 ‘정직성과 청렴성’에선 남성을 앞지른다는 자부심이 있다. 당신은 바로 그 자부심에 상처를 냈다. 한 선배는 “여성이 정직하고 청렴하다는 건 간이 작거나 기회가 없어서였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당신의 경제적 어려움을 동정하기도 했다. 똑똑한 아들은 집안을 일으키는데, 똑똑한 딸은 그럴 기회조차 잡지 못했던 사회적 환경에 대해 한탄도 했다.

 여성 선후배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당신을 이해해보려고 했었다. 한데 당신의 행동은 우리를 실망시켰다.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후 당신은 “법원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 양심의 법정에선 무죄”라고 주장했다. 진정 당신이 결백했다면 검찰에서 법정에서 결백을 증명했어야 한다. 한데 당신은 다만 성경책에 손을 얹고 묵비권을 행사했을 뿐이다. 지금 여성이 누리는 권리가 투쟁의 결과라는 걸 당신은 잊었는가.

 마이너리티들은 주류들과 차별화되는 도덕성·책임감·연대감이 있어야 한 발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앞서 나갔던 여성들은 아무리 작은 위치라도 ‘여성 첫’이라는 타이틀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당신은 첫 여성 총리였다. 실력으로 압도하기 힘들더라도 남성 주류 세력과는 다른 높은 도덕성을 보여주기를 기대했다. 한데 당신의 양심·결백·정치적 보복 주장에 세상은 “남들 다 하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냐는 식”이라며 비아냥댄다.

 당신은 ‘남들보다는 깨끗했다’고 자신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혐의의 일부지만 여동생의 1억원이라는 증거도 나왔다. 당신은 정치적 피해자가 아니다. 과연 당신은 여성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는 책임을 다했는가부터 진심으로 반성하고 후배들과 국민에게 사죄하기를 바란다. 또 기억해주기 바란다. 여성들의 연대감은 상상 이상으로 크고, 우린 반성하고 사죄하는 당신을 가슴 아픈 자매로 끌어안는 날이 오길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