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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명 은퇴 이민 간 필리핀 … 한국인 노부부 또 피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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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 19일 오전 7시(현지시간)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1시간20분 거리에 있는 카비테주 실랑마을에서 한국인 2명이 피살된 채 발견됐다. 이웃주민에 의해 발견된 나모(64)씨와 부인 김모(60)씨는 목과 가슴에 총상을 입고 숨진 상태였다. 사망 추정 시간은 밤 12시~오전 2시. 안방에 있는 소형 금고는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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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등에 따르면 나씨 부부는 7년 전 직장을 그만둔 뒤 필리핀으로 이주했다. 복잡한 마닐라 대신 한적한 교외 지역인 카비테주에 직접 집을 짓고 살았다. 필리핀에 본인 소유 건물도 있어 임대료를 받으며 생활했다고 한다. 사업도 했다고 하는데 어떤 종류의 사업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대사관 관계자는 “한적한 교외에서 은퇴 생활을 하던 노부부가 참변을 당했다”며 “현지 경찰이 수사 중이지만 집을 찾아온 방문객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지 경찰은 집 안에 설치된 폐쇄회로TV(CCTV) 등을 토대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필리핀에는 나씨 부부처럼 한국에서 은퇴한 뒤 제2의 인생을 위해 찾는 이가 많다. 필리핀은 1987년 은퇴청을 설립해 은퇴이민을 받고 있다. 필리핀 개발은행에 1만~5만 달러 정도를 예치금으로 입금하면 특별 영주 은퇴비자가 나온다. 나씨 부부도 은퇴비자를 지니고 있었다.

 주한 필리핀 대사관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지금까지 7000여 명의 한국인이 은퇴비자를 받았다. 30일짜리 관광비자를 내고 필리핀에 들어가 비자를 연장하며 체류하는 이들까지 포함하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고 대사관 측은 전했다.

 필리핀 이민알선업체 관계자는 “자녀 교육을 위해 오는 30~40대, 은퇴 후 여유로운 생활을 하러 오는 60대 이상이 주 고객층”이라며 “한 달에 250만원 정도의 생활비면 가정부와 운전기사 등을 고용하고 골프 등 여가생활을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에 은퇴이민 등을 문의하는 수요도 꾸준하다”고 말했다.

 은퇴 후 여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필리핀을 찾지만 현지 치안에는 빨간불이 켜진 지 오래다. 2013년 13명, 2014년 10명 등 매년 10여 명의 한국인이 피살되고 있다. 올해 필리핀에서 피살된 한국인은 나씨 부부까지 합쳐 7명이다.

 필리핀에서 치안영사를 지낸 동서대 박외병(경찰행정학) 교수는 “필리핀에서는 한국인들이 현금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게 알려져 범죄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며 “불법 총기가 100만 정 이상 유통되고 있고, 현지 치안이 안 좋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하는 게 답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범죄의 표적이 되는 건 금전 문제나 현지인들과의 갈등 때문이다. 필리핀의 한 교민은 “한국 사람들 중 돈자랑을 하거나 현지인들과 사업을 하다 말썽을 일으킨 사람들이 주로 표적이 된다”며 “현지인뿐 아니라 한국인들 사이에서의 갈등도 살인 등 강력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도 잦다”고 말했다.

 필리핀에서 장기체류하고 있는 한국인 8만8000명(추정) 중 주필리핀 대사관에 거주 신고를 한 사람은 5000명도 되지 않는다. 대사관 관계자는 “대부분 귀찮다는 이유로 거주 신고를 하지 않는데, 평시에는 문제가 없지만 대형 재난이 발생했을 경우 연락이 제대로 안 돼 피해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사건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선 상주경비원이 있고 외부인들의 출입이 제한되는 ‘빌리지(village)’에 살거나 은퇴자들끼리 모여 사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대사관 관계자들은 말했다. 나씨 부부도 외진 곳에서 살다 변을 당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은퇴생활을 하러 간 만큼 무리하게 사업 등을 하지 않고 한국 은퇴자들끼리 모여 사는 게 좋다”고 말했다.

안효성·정진우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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