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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미당·황순원문학상] 본심 후보작 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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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늘 다니던 그곳에 새 길을 열다
시 - 김행숙 ‘1월 1일’ 외 19편

해질녘 벌판에서

우리는 저녁 여섯 시에 약속을 하자.

풀잎마다 입술을 굳게 닫아걸었으니

풀잎은 녹슨 열쇠처럼 지천에 버려져 있으니

그리운 얼굴들을 공중에 매달고

땅 밑에 가라앉은 풀들을 일으키자.

우리 혀를 염소의 고독한 뿔처럼 뾰족하게 만들고

서둘러, 서둘러서 키스를 하자.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찔리자. 찌르자.

입술이 뭉개져 다 없어지도록

저녁 여섯 시에 흐르는, 흐르는 피

젖은 내장을 꺼내어

검은 새떼들을 저 하늘 가득하게 불러 모으자.

이제 우리는 뜨거운 어둠을 약속하자.

김행숙(45·사진)은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물·사건·사태 등에 대한 느낌으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있어 탁월한 기량을 보유한 시인이다. 구호나 당위로서 성립되는 공동체의 경우 그 실효가 지속되는 의무의 연한에 따라 성쇠가 좌우되는 것이라면 시인 김행숙이 그간 절실하고 적실한 언어로 확보해온 공감의 테두리는 자발적 동의의 분위기 속에서 형성되는 정념에 기초하기 때문에 어떤 억지나 의무감이 없이도 확장일로에 있다.

 사물과 접촉하는 우리의 감각을 고유한 언어로 표현하는 이 시인은 오래된 사물과 일상 자체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세계를 접하는 감각 자체를 일신하기보다는 지각과 감각의 방식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통해 공감의 영역을 확보한다. 즉, 그의 시는 우리에게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의 새로운 노선을 개설해주었다. 그러므로 그의 시가 우리에게 이만큼 가까이 와 있는 것은 낯선 세계를 동행하는 이들의 연대감보다는 늘 다니던 길에 신설된 노선을 함께 타고 다니게 된 즐거움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 ‘당신’이라는 시어를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한 김행숙의 작품들에서 그 말의 어감이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작품 ‘해질녘 벌판에서’에서 그 공감의 양상은 조금 더 깊어진다. 이 시는, 새로워서 친숙해지고 친숙해져서 지겨워지는 시간들을 함께 겪은 동행인들이 이제 서로를 상처내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면서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는 단계로 진입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니 보다 적실하게는 그런 과정을 요청한다고 할 수 있겠다. ‘뜨거운 어둠의 약속’이란 어두워져 뜨거운 약속으로 공동체의 새로운 규약이 된다.

조강석 (문학평론가)

◆김행숙=1970년 서울 출생.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등. 문학에세이 『에로스와 아우라』. 강남대 국문과 교수. 노작문학상 수상.

돈을 좇는 사람들 서글픈 초상
소설 - 김솔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

영국 런던은 자본주의의 메트로폴리스 중 하나인 덕에 근대 초창기부터 한국 소설에 자주 등장하던 공간이다. ‘추월색’(1912)의 ‘영창’이 근대의 신사로 교육받은 곳은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이며, 이상의 ‘실화’(1939)에서 주인공이 가고자 하던 곳도 ‘英京 倫敦(영경 윤돈·영국 수도 런던)’이다. 황석영의 『바리데기』(2007)에서 탈북자 ‘바리’가 천신만고 끝에 정착한 곳 역시 런던이다.

하지만 기존의 작품들과는 달리 김솔(42·사진)의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에는 단 한 명의 한국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서사는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밀입국한 ‘하마드 세와’와 타이베이 출신의 ‘루 첸’, 벨기에에서 온 ‘장 크리스토프 드니’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한국 문학’의 공감을 민족적 공간과 인물의 혈통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쓰기와 읽기의 관습에서 보자면 김솔의 단편은 낯선 독서의 감각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루 첸’과 ‘장 크리스토프 드니’는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의 맥도날드 지하 화장실에서 울고 있는 ‘바이 부레(하마드 세와)’를 만나게 되고, 그를 아프리카 출신 축구선수로 오해해 21세기적 주종 관계인 에이전트 계약을 맺는다. 서사는 상품으로 치면 하자 있는 상품인 ‘바이 부레’를 유럽 곳곳의 구매자에게 판매하고, 그가 다시 반품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바이 부레’는 이 유통의 여정 속에서 블랙 컨슈머가 되어 잠시 일확천금에 성공하지만 곧 모든 것을 잃고 결국에는 타이베이로 떠나간다. ‘인간의 항문을 신의 곳간’이라고 부르며 그곳에 귀중품이 담긴 콘돔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바이 부레’의 모습은 세계 어느 곳에나 맥도날드의 화장실이 있는 것처럼 만연된 이 시대의 비극이다. 김솔은 돈을 좇아 런던으로 모여든 인터내셔널 장삼이사들의 블랙코미디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피커딜리 서커스’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근처’임을 알려주고 있다.

서희원 (문학평론가)

◆김솔=1973년 광주광역시 출생. 고려대 기계공학과 졸업.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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