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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가 대세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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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맥락과 무관하게 존재만으로 조롱받는 비호감 단어가 있다. ‘허세’도 그중 하나였다. 중2병의 대표 증상으로 허세가 꼽히고 ‘오늘의 운세’가 알려주는 행동지침에 ‘허세 부리지 말고’란 구절이 거의 매일 빠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최근 ‘허세’의 위상이 달라졌다. 사랑받는 대세 트렌드가 된 것이다.

 예능 프로에서 맹활약 중인 ‘허셰프(허세 셰프)’ 최현석과 공화당 대선 레이스에 뛰어든 부동산 부자 도널드 트럼프, 모든 면에서 전혀 다른 이 두 남자가 각각 한국과 미국에서 허세 캐릭터로 인기를 끄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지금껏 많은 이가 미덕이라고 치켜세우던 겸손 대신 과장된 몸짓의 잘난 척, 있는 척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그럴수록 오히려 인기가 치솟는다. 허셰프는 숱한 브랜드 광고 모델을 섭렵하고 있고, 특히 트럼프는 막말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화당 대선 주자 가운데 압도적인 지지율 1위다. 왜일까.

 『기업의 천재들』(진 랜드럼)에 실린 트럼프의 말에 힌트가 있다. “내가 무엇인가를 선전하는 핵심 방법은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환상에 영합해 움직인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대단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대단한 사람을 보면 흥분하고 좋아한다.”

 전 세계가 그의 부(富)와 기행을 다 아는 마당에 트럼프는 굳이 선량한 서민 코스프레를 하지 않는다. 대신 정치인 면전에 대고 “당신도 내 돈을 받았으니까 내 결혼식에 온 거잖아”라고 막말을 퍼붓는다. 물론 때론 감정 조절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아마도 사리 분별 못하는 머저리라서가 아니라 “속 시원하다, 역시 트럼프”라고 엄지손 치켜세워줄 대중에 영합하기 위한 작전일 것이다. 늘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전용기와 헬기를 타고 요란하게 등장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모든 현상에는 당대의 시대상이 담긴다. 허세에 환호하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박정자)를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과시적 소비를 통해 자신들의 특권을 확인해온 상류층이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는 검소함으로 차별화하기 시작했다. 신분 상승 사다리를 타려는 중간층이 상류층을 흉내 내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면 상류층은 값싼 순두부를 먹는 식으로 말이다. 가진 자의 입장에선 검소와 겸손이 품위 있는 차별화겠지만 없는 자 눈에는 일종의 가식으로 비쳐질 뿐이다.

 그런 면에서 허세의 부상은 결국 가진 자들의 가식에 대한 대중의 피로도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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