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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 20종 다루던 원조 걸그룹 60년대 미국서 선풍적 인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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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호 06면

1953년 데뷔해 성공적으로 미국에 안착한 걸그룹 김시스터즈. 왼쪽부터 민자·애자·숙자. 아래는 11일 한국을 찾은 이민자씨의 모습. 현재도 재즈 드러머인 남편과 함께 헝가리에서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에서 온 세 자매를 소개합니다. 김시스터즈!”

28년만에 귀국한 ‘김시스터즈’의 이민자

1960년 미국 CBS의 ‘에드 설리반 쇼’에 등장한 3명의 소녀를 보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동양, 그것도 전쟁 고아의 나라 한국에서 온 예쁘장한 소녀들이 웬만한 미국 가수들보다 유려한 화음을 뽐내며 팝송을 부르니 그럴 수밖에. 어디 그뿐인가. 이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는 가야금을 뜯으며 ‘아리랑’을 열창했고, 아일랜드계인 설리반을 위해 백파이프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연주 가능한 악기만 무려 20여 개에 달했다. 지금이야 소녀시대가 전용기를 타고 유럽 순회 공연을 하고 2NE1의 씨엘이 세계적 스타와 어깨를 나란히 해도 어색하지 않지만, ‘한류’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 첫 미국 진출 걸그룹의 탄생은 그야말로 빅 뉴스였다.

이들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9년부터 아시아인 최초로 라스베이거스 스타더스트 호텔에 마련된 전용 무대에서 거의 매일 공연을 올렸고, 이들이 초청한 ‘김브라더스’는 건너편 펄 호텔에 공연장을 마련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76달러였던 시절, 김시스터즈의 주급이 1만5000달러에 달했다니 가히 그들의 인기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온 미국이 ‘동양에서 온 마녀들’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멤버였던 이민자(74)씨는 “당시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해 인터뷰도 할 수 없었지만 노래를 통째로 외우고 악기를 연습해 무대에 올랐다”고 회상했다.

추억의 이름이 재소환된 것은 김대현(50) 감독 덕분이다. 원조 걸그룹의 탄생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다방의 푸른 꿈’이 13일 개막한 제11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 ‘한국번안가요사’(2012)를 연출했던 김 감독은 “김 시스터즈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대중가요의 중요한 흐름이 보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들의 삶은 한국 가요사와 궤를 같이 한다. 가수 이난영(1916~65)과 작곡가 김해송 부부의 딸인 숙자(76)ㆍ애자(1940~87)씨와 이난영의 오빠이자 역시 작곡가였던 이봉룡(1914~87)의 딸 민자씨가 결성한 그룹이기 때문이다. 광복 후 KPK악극단을 결성해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해송씨가 납북된 뒤 자녀들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했다. 세대를 막론하고 ‘목포의 눈물’ ‘오빠는 풍각쟁이야’ 등 다큐 속 음악이 친숙한 건 그들이 남긴 히트곡이 그대로 역사가 된 덕분일 터다. 김 감독은 “음악 가족의 역사의 출발을 기리고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으로 떠난 김시스터즈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이난영의 곡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말했다.

아버지 장례식 이후 28년 만에 한국을 찾은 민자씨는 “바나나를 먹으며 연습하고 공연비로 초콜릿과 위스키를 받으면 암시장에서 돈으로 바꿔 음식을 사먹었다”고 했다. 6ㆍ25 전쟁 때 집이 무너진 기억이 선한데 마천루가 빼곡히 들어선 서울의 풍경이 어찌 낯설지 않을까. 하지만 여전히 기억해주시는 분이 있어 “감사하다”고 했고 그 시절 활약을 “행운”이라고 했다.

16일엔 김시스터즈를 롤모델로 삼는 ‘미미 시스터즈’와 ‘바버렛츠’의 헌정 콘서트 ‘기쁘다, 민자 언니 오셨네’가 홍대 앞 곱창전골에서 열린다.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애자씨의 깜찍함과 개인 사정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한 숙자씨의 노련함을 함께 만나볼 순 없겠지만 여전히 활기 넘치는 민자씨와 추억 여행을 떠나기엔 충분할 듯 하다. ●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뉴시스ㆍ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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