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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시민’이 살아야 경제가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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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부

한국이 구조적 저성장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61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은 8%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기록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였다. 그러나 2007~2013년의 성장률 순위는 다섯 번째로 하락했다. 통상적으로 경제성장 요인이라고 알려진 투자·교육·연구개발 지출 모두에 있어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의 투입을 하고도 이 정도 성과밖에 거두지 못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대로 가면 향후 순위가 더 낮아질 것이며, 1인당 국민소득이 하락할 가능성마저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일정 수준에서 멈추었거나 심지어는 경제 붕괴를 경험한 경우도 있다. 옛소련·동유럽 사회주의 경제는 1인당 소득 1만 달러의 벽을 넘지 못하고 붕괴했다. 그리스는 3만 달러를 넘어섰다가 2만 달러대 초반으로 주저앉았으며, 이탈리아는 3만 달러대에서 멈추어 서 있다. 90년대 중반에 1인당 소득이 4만 달러를 넘었던 일본도 다시 3만 달러대로 추락했다.

 위의 국가들의 공통점은 자율과 창의, 청렴과 높은 신뢰로 정의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다. 옛날 경제학은 높은 투자와 교육, 연구개발만으로 경제가 성장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발전된 경제학에 따르면 경제성장의 뿌리는 좋은 제도와 문화다. 제도와 문화가 잘 확립돼야 거기서 자율과 창의가 나오고 지속적인 혁신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1인당 소득 4만 달러대 이상의 경제를 이끄는 동력이다.

 자원의 동원이 중요한 시기에는 국가주의(statism)가 경제성장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정부가 주도하는 관행은 시민역량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자율과 자치에 바탕을 둔 창의와 혁신의 단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국가주의에서 시민주의로의 대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었으나 여기서 실패한 경우다.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의 시민역량은 매우 낮은 수준이며 이것이 한국 경제를 고비용·저효율로 만드는 근본 원인이다. 그런데 아직도 정책 결정자의 사고는 옛날 경제학의 틀에서 맴돌고 있다. 무엇이 문제의 본질인지 알지 못하고, 토목공사와 경기 부양 등 대증요법으로 구조적 위기를 벗어나려는 헛발질을 해왔다. 무지와 5년 정부의 단기 성과주의가 결합된 까닭이다.

 한국은 국가주의의 최첨단에 있다. 한 예는 연구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다. 학술지의 등급 심사마저 준정부기관에서 주관하는 나라는 찾기 어렵다. 심사 항목에는 논문 심사자의 수, 편집위원의 지역적 분포 등 세세한 내용이 망라돼 심사를 위해 많은 서류 작업을 해야 한다. 미국의 학술지 평가는 학계 자율로 이루어지며 영국 대학의 연구 역량은 교수들이 5년 동안 쓴 4편의 논문을 각 학문 분야의 우수 학자가 평가하면 끝이다. 따라서 한국처럼 온갖 서류를 준비, 작성하는 데서 오는 낭비는 없다. 국가주의가 득세하는 곳에서 창조경제를 외치는 것은 사회주의 경제에서 창의성을 찾는 것과 같다.

 국가주의는 시민사회의 발전을 저해한다. 한국인의 타인에 대한 신뢰수준은 낮다. 그런데 이 낮은 신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관계 당사자끼리 논의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지속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을 건너뛰어 정부 개입과 사법부의 판결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면 시민 간의 자발적인 상호작용은 생기기 어렵다. 아파트 동장을 뽑는 데도 사법부와 행정부가 관여하는 나라에서 시민정신이 싹틀 수 있을까.

 낮은 시민사회 역량은 경제성장을 저해한다. 1990년대 중반 “동일한 물건을 10% 낮은 가격으로 팔겠다는 낯선 사람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라고 러시아 기업인들에게 물었을 때 불과 1.4%만이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했다. 반면에 폴란드에서는 42.5%의 기업가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그 결과 체제이행기 동안 러시아 국민소득은 40% 이상 하락한 반면 폴란드는 10%의 감소에 그쳤다. 러시아에서는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거래를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많은 증빙서류를 요구하게 된다. 그 결과 경쟁이 저해되고 비효율이 증가한다. 더욱이 국가주의와 낮은 신뢰는 부패를 증가시킨다. 만약 한국인의 타인에 대한 신뢰와 청렴도가 미국 수준으로 상승한다면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최대 1.3%포인트 추가 상승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제 한국 경제 성장의 엔진을 교체해야 한다. 시민의 자율과 자치, 신뢰라는 시민역량이 새로운 성장 동력이 돼야 한다. 그러나 지난 세제개혁에서 정부와 국회는 시민사회의 척도이자 원동력인 기부금의 세금 공제 혜택을 올리기는커녕 오히려 낮추었다. 이런 소탐대실 정책을 그만두고 이제부터라도 시민역량 강화에 온 힘을 모아야 한다. 시민정신이 살아야 경제가 살기 때문이다.

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