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여파인가, 지구촌 휩쓰는 민족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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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의 시대는 저무는가. 그리스 국가부도 위기사태가 간신히 봉합됐지만 이를 계기로 ‘민족주의’ 갈등이 새로운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선진국·후진국 간 전통적 남북갈등은 물론, 유럽 내에서도 남북·동서 간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과거의 영광’을 부르짖기 시작했고 일본도 안보법제를 계기로 민족주의 대열에 동참했다. 1993년 유럽연합(EU) 출범으로 시작된 세계 통합의 물결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란 거대한 암초를 만난 셈이다.

유럽 언론들은 19일(현지시간) 그리스 구제금융협상 과정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독일이 강경한 목소리를 내면서 독일은 60년 넘게 지우고 싶어했던 ‘나치’의 그림자에 발목을 잡혔다고 보도했다. 그리스 아테네 거리에선 메르켈 총리를 나치 캐리커처에 사용하고, 독일 내에서도 극우파를 중심으로 그리스를 유로존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독일의 대표적 지성인 위르겐 하버마스(86) 괴테대 명예교수조차 최근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독일이 반세기 동안 쌓아온 정치적 자산을 하룻밤 새 탕진해버린 게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인터넷신문인 허핑턴포스트도 이달 초 ‘그리스에서 프랑스·중국까지. 민족주의가 돌아왔다’(From Greece To France To China, Nationalism Is Back In A Big Way)는 제하의 기사에서 각국 민족주의의 발호를 지적했다.

뉴스위크 기자 출신인 하워드 파인먼은 기사에서 “중국이 오는 9월 계획 중인 대규모 열병식은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항복을 기념해 열린다”며 “중화주의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를 압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EU 회원국인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민족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지난해 스코틀랜드 분리독립을 가까스로 막아낸 캐머런 영국 총리는 자국에 유리하게 EU협약을 개정할 것을 EU측에 요구한 상태다. 캐머런 총리는 협상결과를 바탕으로 2017년 말까지 EU잔류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다.

프랑스에선 이달 초 그리스 국민투표 과정에서 극우주의 정당인 국민전선(FN)이 그리스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긴축안 반대 주장을 지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념적으로 정반대인 시리자를 지지한 것은 프랑스의 EU탈퇴를 공공연히 주장하는 FN의 노림수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허핑턴포스트는 세계화가 내셔널리즘의 불씨를 끄기는커녕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전 세계적 자본의 흐름이 다국적 기업을 탐욕스럽게 만들고 가난한 나라의 긴축을 불러오면서 민족주의의 불씨가 됐다는 것이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제레미 샤피로 연구원은 “세계화라는 지렛대가 오히려 각국의 정체성을 더욱 중요하게 인식하도록 만들었다”며 “내셔널리즘은 인간사에 있어 가장 강력한 힘이며 유럽과 다른 지역에서 다시 한번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말했다.

반서방주의를 강화하고 크림반도를 합병하는 등 영향력 확대에 나선 러시아, 집단적 자위권을 명시한 안보법제로 패전의 과거를 씻으려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이들 국가들의 민족주의 강화 움직임이 주변국과의 긴장감을 높일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최근 미 상원 군사위원회 연설에서 “중국은 ‘힘의 균형을 믿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나라다. (중국의 패권주의는)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동아시아 전문가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도 지난 10일 칼럼전문 웹사이트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기고에서 “중국이 문화·경제적 힘을 강조하면서 ‘소프트파워’를 키우려 노력하고 있지만 내셔널리즘을 부추기고 공산당을 통한 통제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소프트파워는 제한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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