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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경민의 시시각각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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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민
정경민 기자 중앙일보
정경민
경제부장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충격에서 한숨 돌린 2010년, 미국 경제학계는 주범 색출에 나섰다. ‘부동산 불패’ 신화만 믿고 100만 달러짜리 집에 120만 달러를 퍼 준 은행. 휴지 채권을 파생상품으로 둔갑시켜 투자자를 울린 월가. 깡통 채권에 ‘투자적격’ 도장을 남발한 신용평가사. 빚 무서운 줄 모른 가계. 수사선상엔 여러 용의자가 올랐다. 한데 정작 미 경제학계가 지목한 배후는 중국 정부였다. 범행 도구론 ‘환율’이 꼽혔다.

 ‘중국 정부가 위안화 값을 인위적으로 떨어뜨려 수출품 가격을 낮췄다. 그 덕에 미국을 상대로 천문학적 무역 흑자를 올렸다. 그만큼 재미 봤으면 미국 제품도 사줄 만한데 소비는 안 하고 미국을 상대로 돈놀이를 했다. 순진한 미국인은 그런 줄도 모르고 분에 넘치게 먹고 마시다 쪽박 찼다’. 미 경제학계가 내린 진단이다. 한마디로 미국인의 과소비는 중국 정부가 환율 조작으로 번 달러를 막 빌려준 탓이란 거였다. 중국 정부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발끈했지만 미국 정부와 의회는 막무가내였다.

 20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미국은 ‘무역 불균형의 시정’을 내세웠다. 중국을 향해 ‘위안화 값은 올리고 내수를 부양해 미국 제품도 사라’고 으름장을 놨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저항했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집요했다. 비록 경상수지 흑자나 적자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4%를 넘지 못하게 묶자는 미국의 제안은 미수에 그쳤지만 G20 정상회의가 채택한 ‘서울 선언’은 오바마의 전리품이 됐다. 중국은 위안화 값을 올려야 했다. 등 떠밀려 내수 부양에도 나섰다. 그 후유증으로 부풀어 오른 부동산·주가 거품은 요즘 중국 정부의 두통거리다.

 장면을 바꿔 지난 12일 밤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 정상회의. 지난 5일 국민투표로 채권단의 긴축안을 걷어찬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의기양양했다. 그의 뻔뻔함에 유로존 정상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리스는 이미 2010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2400억 유로나 구제금융을 받았다. 그런데 빚을 갚기는커녕 3차 구제금융에 원금까지 탕감해달라니! 그러나 치프라스도 영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독일과 그리스가 나라 살림은 따로 하면서 유로란 단일 통화를 쓰기로 한 건 애당초 불공정 게임이었단 거다.

 경제력 격차가 있는 두 나라의 무역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는 환율이다. 한쪽에 적자가 쌓이면 그 나라 돈 가치가 떨어진다. 이는 수출품 가격은 낮추고 수입품 가격은 올려 자연스럽게 무역 적자를 줄인다. 배가 한쪽으로 기울면 평형수가 반대로 움직여 균형을 잡아주는 원리와 같다. 그런데 독일과 그리스 사이엔 환율이란 평형수가 빠졌다. 소달구지를 모는 그리스가 벤츠 탄 독일과 똑같은 선상에서 경주를 해온 셈이다. 그리스 입장에선 억울할 만하다.

 독일은 그리스에 자동차 같은 공산품을 팔아 무역 흑자를 냈다. 오는 정이 있었으면 독일인도 그리스 농산물을 먹어주고 파르테논 신전에 가서 화끈하게 지갑을 여는, 가는 정도 베푸는 게 도리다. 그런데 독일은 그리스를 상대로 돈놀이에 열중했다. 그리스인만 멋모르고 독일이 빌려준 돈으로 독일 물건 사는 데 펑펑 쓴 셈이다. 이게 다 환율이란 평형수를 빼버린 탓이니 그리스가 빚더미에 올라앉은 덴 독일도 책임이 있다는 게 그리스의 항변이다.

 낯익은 광경이다. 중국이 빌려준 돈으로 중국 물건을 수입해 흥청망청했다 쫄딱 망한 미국인과 빼닮았다. 그러나 미국인과 그리스인이 맞을 현실은 하늘과 땅 차이다. 미국은 중국 정부 팔까지 비튼 덕에 금융위기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다. 반면 그리스는 유로존 정상회의에서 뭇매 맞고 재정 주권마저 빼앗긴 채 빌어먹을 신세가 됐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 늘 강대국 입맛 따라 재단되는 고무줄이 국제금융질서다. 요즘 국제금융가는 심상치 않다. 곳곳이 지뢰밭이다. 이럴 때 안방 이해다툼에 한눈팔다간 언제 고무줄 잣대의 제물이 될지 모른다.

정경민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