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여성운동 20년] "女權 당당" 일깨운 큰 목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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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983년 6월 13일 오전 9시. 서울 저동 영락교회 건너편 애플다방 건물 옥탑방. 5평 남짓한 공간에 놓인 전화기가 요란스레 울렸다. "내 마누라를 내가 때리는데 네×들이 무슨 상관이야!"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 여성폭력 추방운동에 앞장서 온 '한국여성의 전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택시기사의 전화폭력과 함께 문을 열었다.

그로부터 닷새 후인 83년 6월 18일. 역사의식과 여성주의 시각, 열정으로 충만한 50명의 여성이 이화여대 앞 다락방에 모였다. 진보적 여성운동의 산실이 됐던 '여성평우회'창립총회였다.

현대 한국여성운동에 큰 획을 그은 두 여성단체가 창립된 지 20년이 흘렀다. 두 단체는 창립 20주년을 기념.평가하는 기념행사를 연다.

먼저 여성평우회가 14일 오후 3시 서울여성플라자에서 활동의 역사적 의의를 짚어보고 축하공연도 한다. 여성의 전화는 26일 오후 1시 한국여성개발원에서 회원 한마당 잔치를 연다. 두 단체의 발자취를 훑어본다.

◆여성인권운동의 수호천사들=한국여성의 전화는 아내 구타를 사회문제로 제기한 국내 첫 여성단체다. 개원 당시만 해도 '마누라와 북어는 사흘에 한번씩 때려야한다'는 괴담(?)이 득세하던 때였다.

초대 사무국장 이계경(전 여성신문 사장)씨는 "고작 두대의 전화에 봇물 터지듯 상담이 밀려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개통 초기 보름 동안 걸려 온 상담 건수는 무려 5백41건. 이중 절반 정도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아내들의 애절한 호소였다.

지난 20년간 이 단체가 전국 각지에서 상담해 온 여성폭력에 대한 상담 건수는 1백만건을 넘어서고 있다. 창립을 주도했던 김희선(민주당)의원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한 작은 여성단체가 힘겹게 떠 맡아왔다"고 평가했다.

여성의 전화는 90년대 중반 연이어 터져나온 구타남편 살해사건, 딸을 구타하는 사위 살해 사건을 비롯, 최근에는 개그우먼 이모씨 사건 등을 통해 가정폭력 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왔다. 또한 법제정 운동에도 앞장서 97년 가정폭력 방지법이 제정되는데 구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단체가 20년간을 달려오는 데는 무엇보다 활동가와 회원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밑거름이 됐다. 박인혜 공동대표는 "상담원들이 폭력남편들의 협박전화에 시달렸으며 끔찍한 사건을 상담한 후에는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기도 했다"고 말했다.

여성의 전화는 95년 베이징(北京)세계여성대회를 계기로 여성폭력문제를 여성의 인권을 침해한 문제로 제기하면서 여성인권운동의 지킴이 단체로 발전해왔다.

2003년 현재 전국 25개 지부와 1개 지회에 5천명의 회비납부 회원이 있다. 이현숙 평화여성회 공동대표, 신혜수 유엔 여성차별철폐 위원회 부의장, 이인호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이상덕 안성여자기능대학 학장, 손덕수 개혁국민정당 집행위원, 서명선 여성부 대외협력국장 등은 이 단체에서 활약했던 인물들.

초대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이화수 아주대 명예교수는 아내구타를 첫 과제로 제시한 이 단체의 남성 수호천사다.

진보적 여성운동의 산실=지난달 19일 오후 4시30분. 국회 의원회관 회의실에는 웬만한 여성들은 알 만한 유명 여성 인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옥경 미즈엔 대표, 이미경 국회의원(민주당), 지은희 여성부 장관, 이경숙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김상희 한국여성민우회대표, 강남식 성공회대 교수, 이혜란 여성예술집단 오름 운영위원 등… 여성평우회의 20년을 회고하는 좌담회 참석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창립 당시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운동의 주역들.

이미경: "우리 인생에서 평우회 활동은 결혼만큼이나 중요하니 결혼 비용을 기금으로 내자고 했어요.(하하하)"

강남식: "당시 전세방에 살던 김상희 언니가 50만원이라는 목돈을 척 냈어요. 모두 깜짝 놀라 있는 돈 없는 돈 털어서 1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모았어요. 그 돈으로 구로동 공구상가에 사무실 얻었지요.(박수)"

이경숙:"톰보이라는 당시 유행하던 상표의 의류제조 회사가 여성노동자를 부당해고했어요. 종로 1가 매장에서 피케팅을 했는데 매출이 뚝뚝 떨어졌지요.덕분에 이미경 언니가 7일간 구류를 사는 고초를 겪었지요."

여성평우회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여성해방'을 목표로 한 여성운동단체다. 한국여성운동의 대모로 불리는 이효재 전 이화여대(사회학)교수로부터 영향받은 제자들이 주축이 됐다.

공동대표를 맡았던 池장관은 "양성평등과 사회민주화, 그리고 분단 극복을 위해 운동했다. 지식인 여성들이 서민 여성들의 문제를 함께 고민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평우회는 여성운동의 '종합선물세트'같은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84년 10월, 2천여명의 여성들이 몰려들었던 '여성문화큰잔치'는 여성주의 문화운동의 새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성의 정년은 25세'라는 판결에 반대한 여성조기정년 철폐 운동은 떠들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경숙 대표는 "당시만 해도 여성이 결혼하면 퇴직하는 게 당연시 되던 시절이었다"며 "가사노동 가치가 파출부 일당보다 못한 4천원으로 계산돼 이를 사회문제화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평우회는 86년부터 이념 논쟁에 휩싸이면서 87년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운동의 주역들이 한국여성단체연합.여성민우회.한국여성노동자회 등을 만들어 이후 한국여성운동을 이끌어 왔다. 단체는 사라졌지만 운동은 지금까지 살아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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