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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7월 몽심재에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35호 27면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누군가 좋은 글을 보내왔다.

#미루나무가 훤칠한 7월, 하얀 감자꽃이 활짝 필 즈음에 한 줄기 빗방울이 떨어진다. 며칠이고 마음이 공허했다. 가끔 그림을 그리지만 그것도 마음이 평온할 때나 하는 일이다. 붓질도 부산하거나 혼탁한 마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이런 때엔 선배나 평소에 가고 싶었던 장소를 찾아간다.

지리산 아래 남원 호곡리에 있는 ‘몽심재(夢心齋)’라는 조선 후기 고택을 찾았다. 친한 선배 교무가 건강상 휴양하고 계신 곳이다. 공기는 맑고 청정하고, 고즈넉해서 쉬는 데 더 없이 좋은 곳이다. 그곳은 원불교 대종사님께 신의를 바치고 세수 101세까지 사셨던 원로 교무님의 집이기도 하며, 원불교 박청수 교무의 출가지(地)이기도 했다.

기와집 마당 끝 연못에선 수련이 피어 물그림자를 드리운다. 주변 소나무와 대나무들도 그 연못과 노닐고 싶은 듯 바람 따라 흔들린다. 편안해진 마음 저편으로 소태산 대종사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수행자들이여! 소나무의 청량한 그늘과 담쟁이 넝쿨이 달빛을 감싸는 고즈넉한 곳에 머물며 수행한다고 폼만 잡지 말고 세속 사람과 함께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수행자가 되라.”

‘받들어 모시는 마음(供心)’과 ‘대중과 함께하는 마음(公心)’으로 세상을 편안케 하는 교무가 되라는 말씀이다. 원불교 교당이 도심에 지어진 데엔 그런 깊은 뜻이 있다.

#동행한 선배가 50년 전 예화를 들려줬다. 남원 교당에 새로 온 예비 교무가 일을 크게 잘못하여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었단다. 여성인 선진 교무는 너무 화가 나 회초리로 종아리 치면서 “너는 공부할 그릇이 못 되니 보따리 싸 당장 너의 집으로 가거라”고 하였다. 늦은 밤, 교무의 방문에 노크하며 그가 나타났다.

“왜 왔느냐. 이제 보따리 싸서 가려고 왔지.”
“아니요. 너무 아파서 약 좀 발라주시라고 왔어요.”

예비교무가 눈물을 흘리더란다. 순간 선진 교무님도 왈칵 눈물이 나서 서로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지금은 두 분 모두 교화를 열심히 하시다 열반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지리산 호곡재를 넘어 언덕에 오르니 연푸른 대나무 밭이 펼쳐졌다. “인적도 없는 이 언덕에 갑자기 웬 대나무 이리 싱싱합니까” 여쭈니 그곳이 바로 그 예비교무가 태어나신 집터라 했다. 세월이 흘러 집은 허물어지고 대나무만 무성하게 남았다는 것이다. 큰 스승 밑에 훌륭한 제자가 생기는 법. 그는 교무가 되었고 명필로도 유명했다. ‘곳곳이 부처 아님이 없으며 일마다 부처님의 공양이 아님이 없다(處處佛像 事事佛供)’는 글로 사람들에게 교화를 하셨다.

#요즘 박인환의 노래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이 가슴에 머문다.인간은 누구나 함께 어울려 살지만 마음은 혼자다. 논어 위정편에 ‘군자는 두루 어울리되 사사롭게 무리 짖지 않으며, 소인은 사사롭게 무리 짓지만 두루 어울리지 못한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는 말이 위로가 될까, 까칠한 반성이 될까. 요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사람 만나는 일도, 어울리는 일도 번다하게 느껴지니 영락없는 산속 암자의 스님 같다.



정은광 원광대 박물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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