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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게아 - 롱고롱고의 노래<11>네피림의 등장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임수연

수리의 머리 수술 자국을 따라 ‘52. 09. 42. 532. N 13. 13. 12. 69. W. 360. 72. 30. 12. 25920.’ 메시지 문신이 콕콕 박혀있었다. 아직은 이름을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어떤 별자리임이 분명했다.

“누구인가?”

수리의 말에 폴리페서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가둬라.”

누이들은 사비와 마루부터 포박했다.

“놔, 놔. 놓으란 말이야. 우리는 같은 편이야. 못 믿겠어? 우리의 모습을 보라고, 너희와 똑같이 닮았잖아? 자, 보라고.”

마루가 악을 썼지만 누이들은 감정 없는 기계와도 같았다. 수리도 포박당한 채 막무가내로 질질 끌려갔다.

갑자기 파팍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 같은 게 들리더니 모든 빛이 사라졌다. 암흑이었다. 거대한 피라미드 우주선이 세 개의 태양도 파라 고무나무도 붉은 머리 거인들의 피라미드도 먹어치웠다. 사비가 이를 딱딱 소리 나게 부딪히며 떨었다.

“이거 데자뷰 맞지? 우리가 오메가 고고학교 떠날 때도 학교 강당 무너졌잖아?”

“네피림이 도착했다.”

누이들은 혼비백산해서 소리지르며 우왕좌왕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비와 마루를 포박했던 누이들은 그냥 달아나버렸다. 헐겁게 포박된 끈은 금세 풀렸다. 그러나 딱히 어디로 도망칠 곳도 없었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케아라닥틸루스가 다시 나타났다. 어긋난 이빨 때문에 다물어지지 않는 그 징그러운 아가리를 벌린 채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케아라닥틸루스의 눈은 카메라 눈(camera eye)이었다. 누군가 카메라 눈을 통해 현장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다. 케아라닥틸루스가 드디어 폴리페서를 발견하곤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안 돼!”

수리는 소리를 지르며 잽싸게 폴리페서 쪽으로 돌진했다.

“수리야!”

사비와 마루가 동시에 찢어질 듯이 외쳤다. 사비와 마루도 수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순간 피라미드의 천장이 두두두 콰콰 무너졌다. 파라 고무나무는 아예 짜부라졌다. 쿵쾅쿵쾅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크기의 오른쪽 발이 피라미드 지하를 찍어 눌렀다. 바닥이 순식간에 찌지직 갈라지며 요동쳤다.

“아아.”

모두 비명을 질렀다. 네피림의 거대한 오른발에 눌려 형체마저 사라진 누이들도 있었다. 수리는 폴리페서를 덮치고 있었고 사비와 마루는 수리를 덮치고 있었다.

“뻘리 말해요. 어디로 가면 나비를 찾을 수 있죠? 빨리 말해요. 어서!”

“저건, 저건… 팬옵티콘(panopticon)이야. 나도 처음 봤다…. 이 지옥에서 나를 지켜준다면 말해주겠다.”

폴리페서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잡아가려고 굵은 침을 흘리는 케아라닥틸루스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장난치지 마세요, 폴리페서. 당신은 덩치가 나보다 훨씬 크잖아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지킨단 말이에요? 찌질한 겁쟁이 같으니라고.”

그 순간 케아라닥틸루스는 정확하게 폴리페서만 찍어서 어긋난 이빨 사이에 단단히 끼우고 가버렸다. 쿵쾅쿵쾅 이번엔 네피림의 왼발이 나타났다. 피라미드는 완전히 붕괴했다. 물컹한 물속으로 피라미드가 가라앉았다.

장님 물고기 올름은 어디론가 급하게 떼지어 갔다.

네피림과 마주한 세 사람

수리와 사비, 마루는 드디어 네피림의 당당한 실체와 마주하고 있었다. 올려다보아도 올려다보아도 너무 키가 큰 자이언트였다. 수리는 감탄을 연발했다.

“붉은 머리 거인도 큰데, 이건 커도 너무 크다. 이들이 아프리카를 탈출한 호미니드의 조상일까?”

네피림 주변으로 붉은 머리 거인들이 마치 왕을 모시는 전사들처럼 도열했다. 그들은 행동은 느렸지만 꽤 일사불란했다. 네피림이 고개를 숙여 수리를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수리와 사비, 마루는 숨소리마저 숨겼다.

“52!”

네피림은 52라는 숫자를 말했다. 완벽한 기계 소리였다. 네피림의 눈동자를 본 수리는 주저앉을 뻔했다. 수리를 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 수리가 아니라 아름답고 창백하고 푸른 지구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었다.

“수리야. 수리야. 네가 곧 지구야?”

사비는 겁이 나서 입술을 바르르 떨며 속삭였다.

“52!”

네피림은 다시 말했다. 그러자 수리의 민머리, 수술 자국을 따라 박혀있는 메시지 중 ‘52’라는 숫자가 유난히 밝아지며 뚜렷이 튀어나왔다. 수리의 온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수리는 최면에 걸린 듯 되뇌었다.

“52, 52, 52, 52….”

“52를 찾아!”

네피림은 준엄하게 명령했다.

“52를 찾아!”

이번엔 쩌렁쩌렁 울렸다. 여전히 정신이 혼란한 채 52를 되뇌고 있는 수리의 손을 누군가 잡았다. 바로 금발의 흑인 소년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소년이 수리를 보며 분명히 말했다. 소년은 수리의 손을 힘주어 잡아 끌었다. 순간 브라키오사우르스 머리통만 한 네피림의 눈동자가 수리의 목을 뚫어지게 보았다. 바로 수리의 목에 걸린 목걸이, 아빠가 오래 전에 주었던 목걸이였다. 목걸이에 있던 달과 별과 태양은 스스로 발광하고 있었다. 수리는 저절로 손으로 자신의 목걸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빨리, 빨리.”

소년은 재촉했다. 수리와 사비, 마루는 막 달렸다. 일단 네피림 주변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리고 잠시 후, 물컹한 물은 회오리와 함께 용솟음치며 솟구치더니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하늘에 떠있는 물의 대륙이 되었다.

수리와 사비, 마루는 소년을 따라 달렸다. 달리는 아이들 옆으로 별이 있었고 달이 있었고 태양이 있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공룡들이 뛰어다녔다. 날아다녔다.

“피라미드가 사라지다니, 마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 같아.”

수리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피라미드가 무너지고 물컹한 물은 물의 대륙으로 하늘에 걸려있고. 이제 어쩌지? 나비도 찾을 수 없고, 골리쌤도 찾을 수 없고….”

사비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빠도 찾기 힘들어졌어. 아참, 그 많던 누이들은 어디로 간 거야? 혹시 다 죽은 거야?”

흑인 소년이 수리의 손을 다시 잡아 끌었다. 수리가 소년을 보며 웃었다.

“너의 이름부터 만들자. 음, 볼트 어때? 우사인 볼트라는 영웅이 있거든. 어때?”

“볼트?”

흑인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리, 넌 우리의 버드맨이야. 내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갈게.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렸어.”

수리는 멈칫했다.

“볼트, 난 먼저 나비를 찾아야 해. 그래야 아빠를 찾을 수 있거든. 폴더가 약속했어. 그는 약속을 지킬 거야.”

볼트는 해맑게 웃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노인의 지혜를 담은 웃음이었다.

“네피림이 나비를 찾으려 할거야.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해. 그게 수리 너의 임무야. 오래된 임무.”

“오래된 임무라고?”

“그래. 빨리 가자. 너의 오래된 임무에 대해서는 차차 알게 되겠지.”

수리와 사비, 마루는 소년 볼트를 따라갔다. 저 멀리 수상한 빛이 유난히 번쩍번쩍했다.

“어? 저 빛은 뭐지?”

모두 신비한 빛을 향하여 빠르게 뛰어갔다.

다시 노란 집의 거울로

도착해보니 빛의 근원은 바로 커다란 거울이었다.

“우리가 노…란 집에 들어…갔다가, 그래. 거울…의 방에서 보았어. 바로 그… 거…울이야.”

마루는 흥분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그렇다면 이 거울을 통과하면 다른 세상이 나타나겠구나.”

수리는 허리춤에 양손을 얹고 거울을 괜히 노려보는 척했다.

“그래. 미지의 세상으로 가보자!”

이번엔 수리가 볼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함께 거울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야아아~”

새들의 산이었다. 거대한 산을 새들이 하얗게 덮고 있었다. 수천만 마리쯤 될 듯했다.

“와, 새들의 산이야?”

수리는 입이 벌어졌다.

“낮의 새라고 부르지. 저 산은 황금의 산이야.”

볼트의 대답에 수리는 의아했다.

“뭐? 황금의 산?”

볼트는 또 해맑게 웃었다.

“내 눈엔 수천만 마리의 낮의 새들밖에 안 보이는데 황금이 어디 있다는 거지? 하하. 볼트, 장난치지 마라.”

“오랫동안 누이들은 네피림의 노예로 살면서 네피림의 황금을 조금씩 훔쳐왔어, 그래서 황금의 산을 갖게 되었지.”

느닷없이 볼트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든 새들과 모든 물고기와 모든 바람이 서로 사랑을 했네

그곳에서 태양이 태어나고 달이 태어나고 별이 태어났네

그리고 그들이 태어났네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태어났네.

누구보다 누구보다 키가 컸네.”

바로 그 노래였다. 수리는 감격했다.

“아, 이 노래를 이곳에서 다시 듣다니….”

“이곳이 오메가 학교가 된 것 같아. 학교가 그립다.”

사비는 눈물을 글썽였다.

“난, 배가 고프단다. 얘들아. 무엇을 찾든 좀 먹어야 되지 않겠니?”

마루는 자신의 똥배를 화난 듯 팍팍 두드렸다.

볼트의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파팍 번쩍 빛이 명멸하더니 암흑이 되었다. 낮의 새들은 빛의 생명체가 되어 꿈틀하더니 푸드드 후드드 한꺼번에 찬란하게 날기 시작했다. 낮의 새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황금산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와~”

“아~”

수리와 사비는 믿을 수 없었다. 황금의 산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레뮤리아.”

볼트는 자랑스럽게 황금산의 이름을 불렀다.

“52, 52는 찾을 수 있겠지? 레뮤리아?”

수리는 기운이 솟았다.

하지윤은 시인·소설가. 판게아 시리즈 1권 『시발바를 찾아서』, 2권 『마추픽추의 비밀』, 3권 『플래닛 아틀란티스』를 썼다. 소년중앙에 연재하는 ‘롱고롱고의 노래’는 판게아 4번째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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