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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칼럼] ‘에린 브로코비치’ 성공담 한국서 나오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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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김성국
이화여자대학교 경영대학장

지난 2000년 개봉한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열연한 주인공 에린은 두 번의 이혼, 고졸, 보잘 것 없는 경력의 배경을 지닌 여성이다. 그녀는 억울한 교통사고를 당해 소송했으나 패소하고 은행잔고 16달러에 세 아이를 홀로 키워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소송으로 알게 된 변호사 에드에게 사정을 호소하고 그의 사무실에서 장부정리원으로 일을 하게 된다.

 말단 직원으로 일하던 에린은 에너지 대기업 피지앤이(PG&E)로 인해 지역 주민들이 중크롬에 오염됐을 가능성을 발견하고, 특유의 친화력과 호소력을 십분 발휘하여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데 성공한다. 그녀의 활약으로 에드 변호사 사무실은 환경오염 소송에서 승소해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 보상액인 3억3000만 달러 이상을 받아내고, 에린은 거대 기업의 불의에 맞선 영웅이 된다. 만약 그녀가 에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면 이러한 업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에린 브로코비치 이야기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일자리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과연 우리나라에는 결혼해서 세 아이를 키우는 주부에게 자리를 내 줄 기업이 있을까? 에린보다 훨씬 학력이 높고 능력이 있어도 ‘경력단절’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용케 재취업에 성공한 여성이라도 과거의 지위와 급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경력 디스카운드’를 겪는 것이 현실 아닐까?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게 있다. 바로 정부가 추진하는 시간선택제 일자리 정책이다. 에린 브로코비치 같은 성공 스토리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로 볼 수 있다. 시간선택제는 전일제보다 근무시간과 급여는 적지만 복리후생, 근로조건 등에서는 차별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근로자가 사업주와 협의해 근무시간과 요일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유연한 근로제도다. 이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원하는 여성 뿐 아니라 퇴직대비와 재취업을 희망하는 중장년 근로자, 일과 학습을 병행하고자 하는 청년 근로자에게도 매력적이다. 일자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경력을 꾸준히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노사는 시간선택제 도입에 소극적이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노동조합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실업률 감소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정부에 근로시간 단축을 끊임없이 요구해왔다. 그 결과, 신규 고용을 늘리는데 성공했고 불황에서 탈출하며 실업률을 낮출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비율이 서구에 비해 낮고, 청년실업 비율은 높은 편에 속한다. 이처럼 취약한 고용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성과 청년층의 고용을 획기적으로 늘려야하며, 그 해법은 시간선택제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여성인력은 선진국에 비해 가장 개발이 안 되는 인적자원이라는 우려가 있다. 하지만 시간선택제만 잘 활용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과 가정을 모두 챙기면서 능력을 발휘하는 에린 브로코비치 같은 워킹맘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일과 학습을 병행하며 쑥쑥 성장하는 인재들을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성국 이화여자대학교 경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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