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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두려움 느끼게 해야 전쟁 재발 막을 수 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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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51D 무스탕 전투기를 응시하는 노장(老將)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6·25 전쟁에서 활약했던 전투기 만큼이나, 노장의 얼굴에는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은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지난 1일 서울 용산동 전쟁기념관. 무스탕 전투기 앞에서 선 권성근 장군(90ㆍ예비역 공군 소장)은 생사를 함께했던 자신의 분신을 만난 듯 다소 들뜬 모습이었다. 20대 중반의 꽃 같은 나이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죽음 불사했던 그때가 생각나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당시를 떠올리면서 말을 꺼냈다.

“내 비행기를 향해 빗발치듯 날아오는 적의 대공포탄은 마치 비 오는 날 운전을 할 때 차량 옆을 스치는 듯한 수많은 가로등과 흡사하지. 그때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이미 초월하게 돼. 영화 속 장면처럼 고요한 적막 속에서 쏟아지는 유성 속을 비행하는 우주선을 탄 듯한 느낌이었어.”
권 장군은 공군 창설의 주역 중 한 명이다. 일제 강점기에 전투기 조종술을 배워 6·25 전쟁 당시 수백 번을 출격했던 백전노장이다. 전투기 조종간을 놓은 지 벌써 수십 년이 됐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조국의 상공에 있다. 이런 그가 최근 『하늘을 날다』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펴냈다. 그를 만나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등 격동의 세월을 보낸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전투기 조종사가 된 계기는.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전세가 불리해지자 대대적으로 징병을 했다. 차남이었던 나도 징병을 피할 수 없었다. 편평족이었던 나는 군장을 메고 행군을 하는 육군 만은 가지 않기를 원했다. 해군이나 공군을 지원해야 했다. 당시 해군은 한국인을 뽑지 않았다. 비행기를 한 번 본적도 없지만 어쩔 수 없이 17세 때 소년비행학교를 지원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3차례에 걸쳐 시험을 치렀고 운 좋게 합격했다. 정식 입학은 1943년 10월이었다.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본격적으로 조종술을 배웠다. 말레이시아에 배치되고 가미카제(神風ㆍ자살특공대)에 차출되기도 했지만 전세가 급격히 악화돼 실제 출전할 기회는 없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본토 사수를 맡았지만, 겨우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일왕이 갑자기 항복선언을 했다. 결국 배운 기술을 실전에서 활용할 틈도 없이 전쟁이 끝났다.”

6·25 초기 경비행기 타고 맨손으로 폭탄 투하

-6·25 전쟁 발발 당시 상황은 어땠나.
“북한군이 남침한 그날 나는 비행 1중대 소속 공군 소위였다. 격납고가 있었던 여의도 비행장에서 주번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외출하는 장병들의 복장을 점검하고 내무반을 둘러보는 데 갑자기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났다. 직감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들어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늘을 보니 북한이 보유한 소련제 IL-10 전투기가 눈에 들어왔다. 일단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면서 부하들과 함께 반격을 준비했으나 우리가 갖고 있는 무기는 소총과 경기관총 1정이 고작이었다. 이 무기로 적기를 격추하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적기는 두세 번 정도 더 공격을 해왔다. 적기는 격납고를 공격해도 큰 폭발이 없자 우리가 이미 비행기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판단한 듯 사라졌다.”

-북한군의 남침에 대한 우리 공군의 반격은.
“당시 우리가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는 경비행기 몇 대가 고작이었다. 전투기는 없었다. 사실 제대로 반격을 할 능력이 없는 속수무책의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26일 오후에 미군 탄약고에서 15㎏짜리 폭탄들을 가져왔다. 나는 잠자리 경비행기 앞좌석에서 조종을 했고, 뒷좌석 조종사는 폭탄과 수류탄을 안고 탔다. 동두천으로 향했다. 좁은 비포장길에는 북한군 전차(탱크)가 줄지어 내려오고 있었다. 전차를 향해 폭탄과 수류탄을 맨손으로 떨어뜨렸다. 폭탄이 터지면서 잠시 먼지가 일었지만 전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이튿날에도 출격했다. 이번에는 폭탄을 도로 위에 던졌다. 도로를 파괴해 최대한 전차의 남진을 막자는 의도였다. 우리 정부는 이날 이미 대전으로 옮겨갔다.”

전쟁 중에도 영어 공부해 미국 유학도

-전쟁 중 출격하면서 두려운 적은 없었나.
“전투기 조종사들이 가장 두려움에 느끼는 때는 출격 바로 전날 밤이다. ‘내일 어디로 출격할까, 혹시 적에 의해 격추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공포에 사로잡히곤 한다. 하지만 다음 날 일어나면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다. 공격 목표를 배정받는 브리핑을 받은 후 낙하산을 둘러메고 전투기로 걸어갈 때는 아주 담담해진다. 내 경우 전투기까지 걸어가는 발걸음에 홀수와 짝수를 번갈아 붙인 후 짝수가 나오면 오늘도 무사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곤 했다. 무의식적으로 그날의 운수를 점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하루에 2~3차례씩 출격했다.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전쟁 중 수백 번 출격했던 것 같다.”

-6·25 전쟁 중 미국 유학을 떠났는데.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김정렬 장군이 미군 측에 요청해 유학을 하게 됐다. 나는 김 총장에게 ‘전쟁 중에 무슨 공부냐’고 했지만 그는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다녀오라’고 명령했다. 훗날 김 총장은 ‘6·25 전쟁으로 당시 몇 안 되는 우리 공군 조종사들의 씨가 마를 상황이었다. 전쟁이 끝나더라도 몇 명은 남아있어야 공군을 유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조종사 2명을 뽑아 미국에서 최신 조종술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미군 측과의 원활한 작전을 위해 전쟁 중에도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아마 김 총장이 나의 영어실력을 눈 여겨 보고 미국행을 주선했던 것 같다. 52년 말부터 미 공군대학에서 3개월 정도 교육을 받고 귀국했다.”

-6·25 전쟁에 대한 감회는.
“엄청난 희생을 냈던 민족적 비극이었다. 또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들의 대립에 따른 대리전을 벌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조국을 수호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장하고 명령에 따라 움직였던 싸움닭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이런 전쟁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가 적에게 무서운 존재로 인식돼야지만 적이 감히 공격하지 못한다.”

판문점 정전회담 땐 남북 기싸움 팽팽

-판문점 정전회담에 수석대표로도 참석했는데.
“남북한 간의 기싸움이 심했다. 한번은 북한 측이 청계천 다리 밑에 있는 걸인들의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서울에서는 인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다음 회의 때 서울의 번화가와 외국인 관광객, 리틀엔젤스 공연 등을 필름에 담아 상영했다. 이후 북한 측 대표가 바꿨다. 우리 측 반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문책을 당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사실 당시 1인당 소득은 북한이 더 많았다. 그러나 당시 남북한은 손톱만큼도 상대에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우리 격동의 역사를 직접 경험했는데.
“우선 한반도에서 전쟁이 결코 다시 일어나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대립과 갈등이 생기더라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다. 1990년대 초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다. 전투기 조종사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퇴역군인을 만났다. 그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전투기를 타고 대결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을 나눴다. 그리곤 서로 손을 맞잡고 ‘살아서 이렇게 만나게 되니 반갑고 다행’이라며 서로를 격려한 적이 있다. 우리는 종종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예전에 했던 일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역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려면 그런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권성근 장군=1926년 경북 영천 출생. 43년 일본 소년비행학교 입학. 광복 후 경북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로 재직. 49년 공군에 입대. 6·25 전쟁 참전. 69년 판문점 정전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 70년 공군 소장으로 예편. 이후 공군 참전군인회장, 보라매 회장(공군 전역군인 회장) 등 역임.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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