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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버리고 넝마 걸친 귀족, 동굴 묵상으로 빛을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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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로욜라를 향해 떠났다. 길은 꽤 멀었다. 로욜라는 예수회를 설립한 이냐시오(1491~1556) 성인의 고향이다. 또한 예수회의 모원(母院)이 있는 곳이다.

이냐시오 성인이 10개월 넘게 홀로 수도 생활을 했던 스페인 만레사의 작은 동굴. 그는 여기서 ‘죄사함’의 깊은 의미를 깨달았다. 한 스페인 여성이 와서 무릎을 꿇고 고요함 속에 묵상을 하고 있다.

 ◆이냐시오의 절망=쨍한 햇볕 아래 마른 평야가 펼쳐지던 스페인 남부와 달리, 북부의 바스크 지역은 숲이 울창하고 산이 높았다. 산길을 달리던 버스는 이냐시오 성인의 고향 로욜라에 도착했다. 가랑비가 어깨를 적셨다. 예수회 모체가 되는 수도원 앞에는 높다란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냐시오가 태어난 땅.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다. 500년 전 이냐시오의 가족이 살았던 로욜라가(家)의 저택이 수도원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벽에 대포 구멍까지 갖춘 요새였다. 그는 바스크 출신의 귀족이자 기사였다. 초상화를 보면 상당한 미남이다.

 1521년 그의 삶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프랑스전에 참전한 그는 포탄에 맞아 무릎뼈가 박살났다. 목숨을 잃을 뻔한 외과수술을 수차례나 받았다. ‘기사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병상에서 그는 우연히 예수와 성인의 삶을 담은 두 권의 책을 만났다. 바깥의 부귀영화와 명예를 좇던 그의 눈은 서서히 내면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계단을 따라 로욜라가 저택 4층으로 갔다. 이냐시오가 회심한 방이 있었다. 부상에서 회복 중인 이냐시오가 성모를 만나는 환시가 재현돼 있었다. 순례에 동행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이정주 신부는 “예수회의 모토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For the major glory of God)’다”고 말했다. 예수도 그랬고, 사도들도 그랬고, 역사 속의 수도자들도 그랬다. 내가 무너질 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내가 틀어쥔 기대와 욕망이 무너진 칠흙의 어둠, 거기서 이냐시오는 빛을 만났다.

 ◆이냐시오의 회심=이냐시오는 순례의 길을 떠났다. 버스를 타고 그 길을 좇았다. 로욜라에서 몬트세라트로 갔다. 높다란 바위산에 성베네딕도 수도원이 있었다. 그 안에 검은 얼굴의 ‘블랙 마돈나’상이 있었다. 집을 나와 순례를 떠난 이냐시오도 이곳에 왔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기사의 칼을 ‘블랙 마돈나’ 앞에 내려놓았다.

 그건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누구나 무장을 한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의 욕망을 지키기 위해서. 이냐시오는 그런 칼과 갑옷을 성모자상 앞에 내려놓았다. 무장 해제. 그건 예수를 좇아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려는 선언이었다. 입고 있던 기사의 옷도 거지에게 주었다. 대신 넝마 자루를 걸쳤다. 이냐시오는 그걸 “그리스도의 갑옷”이라 불렀다.

 이냐시오는 몬트세라트 근처의 작은 도시 만레사로 갔다. 그리고 동굴로 들어갔다. 당시 그는 수도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1년 가까이 홀로 수도 생활을 했다. 동굴 앞에서 버스를 내렸다. 크지 않은 동굴이었다. 암벽에 손을 짚었다. 침묵이 흘렀다. 스페인 여성이 와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묵상을 했다. 이냐시오는 그 동굴 속에서 매일 7시간씩 무릎 꿇고 기도를 했다.

 음식은 마을에 가서 탁발로 해결했다. 자신을 돌아보며 죄가 보일 때마다 고해 신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죄를 고백했다. 끝이 없었다. 고해하고, 고해하고, 또 고해해도 죄는 쉬지 않고 솟아났다. 단식도 하고 고행도 했다. 소용이 없었다. 구원이 까마득하다는 절망에 그는 자살까지 생각했다. 자살은 큰 죄라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이냐시오는 사람의 죄를 대신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대속(代贖)의 의미를 절절하게 묵상했다. 그리고 깊이 깨달았다. 신은 자비와 은총으로 이미 모든 죄를 용서했음을 말이다. 이냐시오는 비로소 해방감을 느꼈다. 그걸 “꿈에서 깨어났다”고 표현했다. 결국 꿈을 깨는 일이다. 수도의 길, 영성의 길. 그 끝에서 우리는 꿈을 깬다. 꿈을 깰 때마다 사랑도 깨어난다. 동굴을 나설 때 이냐시오가 던진 메시지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영혼의 무게, 그것이 사랑이다.”

로욜라·만레사(스페인)=글·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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