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203)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36)-행인 이승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범이는 이렇게 부드럽고 너그러운 성질이었지만 무골호인도 아니고 덮어놓고 남들과 부화뇌동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춘곡 고희동이 서화협회 총회때 모든일을 독단으로 해나가려고 하면 범이는 반드시 일어나서 따지고 혼자서 덤벼들었다. 해방후 옛날선배가 화단일을 무원칙하게 처리하려고 할때 범이가 반대하여 바로 잡기도 하였다.
범이는 그림보다도 비평이 장기여서 30연대의 회화비평은 도맡아할 정도로 왕성한 비평활동을 하였다. 이당을 정당하게 평가한 것도 범이였는데 묵노는 이때문에 범이와 정면 충돌한 일까지 있었다. 입이 건 묵노는 범이가 이당한테 무엇을 얻어 먹고 이당을 칭찬했다고 떠들어 두사람이 낮을 붉힌 일까지 있었다.
윤희순은 해방이 되자 돌연히 사원대회에 등단해 좌익적인 열변을 토하여 서울신문사 자치위원회의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는 좌익패들의 앞장에 서서 여러가지 사무를 처리해 나갔는데 이것때문에 과로한 탓인지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동대문밖 영도사에서 영면하였다.
김종태보다는 오래 살았지만 40을 갓넘어 숨진 것이다.
이 삼총사중에서 제일 오래 산사람이 묘인 이승만이다. 그는 삼총사중의 보스격이었는데 해방후 범이가 좌익편으로 설친다고 하여 몹시 못마당하게 생각하고 잘만나지도 않았다.
성질이 대꼬챙이 같이 꼬장꼬장하여 추세를 따라 이리저리 쓸리는 사림을 제일 싫어하였다.
행인은 서울태생이고 휘문고보에서 윤희정파 동창이었다. 동경에 건너가 천단화학교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귀국하여 토월회의 제2회공연때 하이넬베르크성의 참신한 무대장치를 만들어 토월회공연을 크게 성공하게 만들었다. 행인 자신도 이 무대장치가 일본의 축지소극장에서 만든 무대장치보다 훨씬 낫다고 하였다. 토월회의 그때 공연물은 모든 것이 축지소극장에서 한것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나중에 연극평이 나왔는데 『은그릇에 설렁탕 담은 격』 이라고 하였다. 은그릇이란 무대장치를 말하는 것이고 실렁탕이란 연기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어쨌든 무대장치가 우수하였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행인은 이때의 무대장치로 일약 명성을 얻었고, 이어 「선전」 제4회에 『라일락』이 나혜석의 『낭낭묘』와 함께 입상되었다. 제6회에는 『사월풍경』으로 특선되었고, 제7회에는 『풍경』으로 특선됨에 이르러 김종태와 함께 혜성같이 나타난 신진 양학가로서 세평이 자자하였다.
그런데 제4회에 출품한 『라일락』에는 이런 일화가 있었다. 김복진이 「선전」에 출품하자고 해서 행인도 유화를 그려 출품하기로 하였는데 행인의 유화구에는 없는 색깔이 많았다. 이것을 새로 사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묘인은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이것을 눈치챈 철마 김중현이 수채화를 같이 그리자고 제의해왔다. 그때 김중현은 총독부 토지조사국 하천계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제도용으로 주문해 온 영국제 물감과 값비싼 영국제 와이매지가 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둘이서 수채화를 그려 보자는 것이었다.
묘인은 수채화를 그려본 일이없어 주저했지만 철마말이 수채화란 별게 아니고 자기가 요령을 가르쳐 줄테니 그대로 그리면 된다고 하였다. 수채화는 유화와 달라 한번 붓을 댄 뒤에는 자꾸 개칠을 하면 안되니까 그점만 주의하라고 하고 그밖에 사소한 점을 일러주었다. 행인은 그때 만개했던 라일락꽃을 따다가 병에 적당히 꽂고 그것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유화만을 그리던 송씨라 철마의 주의에 따라 재주껏 그려보았지만 별로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려 놓았으니 출품을 안할 수가 없어 기일에 대어 출품하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