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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음악 정신에 충실한 바그너 해석의 권위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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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호 06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22일(현지시간) 드디어 새로운 수장을 지명했다. 그동안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안드리스 넬손스와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아니다. 올해 마흔셋인 러시아 출신의 젊은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가 사이먼 래틀을 이어 2018년부터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잡게 된 것이다.

마흔셋에 베를린필 새 수장 키릴 페트렌코

키릴 페트렌코라는 이름은 국내 클래식 팬들에게는 낯설 수 있다. 아직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인데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활동 반경, 수줍은 성격 탓에 언론에도 별로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1972년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태어났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와 음악학자인 어머니를 두고 이미 11세에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할 만큼 재능을 보였다. 아들에게 보다 나은 음악 교육을 시키고자 아버지는 그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오스트리아의 포랄베르크(Vorarlberg)로 이주, 현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며 학생을 가르쳤다. 당시는 구 소련 붕괴를 앞둔 정치적 혼란기였고,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기도 했다.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한 페트렌코는 졸업하자마자 빈 국민오페라극장(Volksoper)의 부지휘자이자 카펠 마이스터로 지휘 경험을 쌓아나갔다. 그가 대중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예술 감독으로 몸담았던 독일 메닝겐 오페라 극장에서였다. 바그너 ‘니벨룽겐의 반지 시리즈’를 탁월하게 해석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2013년부터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도 ‘니벨룽겐의 반지 시리즈’ 지휘를 맡을 만큼 그는 뛰어난 바그너리안 지휘자라는 평가를 얻어냈다.

메닝겐에 이어 베를린 코믹 오페라(Komische Oper)에서도 인상적인 활동을 하며 2007년까지 오페라를 중심으로 착실히 레퍼토리를 쌓아 나갔다. 이후 한동안 프리랜서 지휘자로 활동하던 그는 2013년부터 전임자 켄트 나가노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단의 음악감독이 됐다. 바그너가 활동하던 19세기 후반 그의 작품들이 초연된 뮌헨의 국립극장을 근거지로 삼는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의 지휘봉을, 오늘날 가장 뛰어난 바그너 해석자로 꼽히는 페트렌코가 이어받은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지도 모른다.

바그너 오페라에 있어서는 지나칠 정도로 까다롭고, 호불호가 분명한 뮌헨의 청중들을 완벽히 사로잡은 그는 바그너뿐 아니라 모차르트부터 도니제티, 슈트라우스, 알반 베르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이며 음악적 역량을 입증해냈다. 이러한 오페라적 역량이 그가 베를린필 단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요인이 됐다.

카라얀에서 아바도를 지나 사이먼 래틀에 이르며 베를린필은 무엇보다 오케스트라의 음악적 성장을 위한 선택을 주저하지 않았다. 타악기 주자 출신의 사이먼 래틀은 20세기 이후 현대 음악에 강한 지휘자로 베를린필의 레퍼토리 외연을 넓히는 데는 기여했으나, 독일 음악에 있어서는 신선한 해석을 한다는 평 그 이상을 받지 못했다. 바그너로 대표되는 독일 오페라 레퍼토리 특유의 육중하고 탐미적인 사운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혹평을 받았다. 영국인으로서 독일 음악의 정신(가이스터)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는 지적도 있었다. 단원들과의 불화도 쌓여갔다. 기 세고 말 안 듣는 단원들이 래틀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연주한 탓에 베를린필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베를린필의 가장 목마른 지점을 채워줄 수 있는 지휘자로, 페트렌코는 객원 지휘를 하러 올 때마다 단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차기 지휘자로 거론돼 왔다. 음악에만 몰두하느라 야심이 넘치지 않고 수줍음 많은 성격의 그는 주요 후보군에서는 배제돼 왔다. 하지만 단원들은 결국 그의 이름을 호명했다. 우아함과 절제가 깃든 탐미적인 사운드, 가장 독일적 미학에 충실한 음악을 들려주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키릴 페트렌코와 함께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

파리 글 김나희 클래식평론가 nahui.adelaide.kim@gmail.com 사진 Lewin Management (c) Wilfried Hö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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