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참뜻 다시한번 되새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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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크리스머스가 다가온다. 광장에 그리고 각 집안에 크리스머스트리가 세워지고 울긋불긋한 등불이 장식된다. 화려하게 포장된 선물들이 거리의 쇼윈도를 꾸미고 선물을 사는 사람들이 상점을 메운다. 모두가 풍성하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인다. 모든 인류가 한결같은 형제자매로서 서로 사랑해야함을 가르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하느님의 아들「예수」의 탄생을 축하함은 당연하다.
크리스머스시즌과 때를 같이하여 매일저녁 TV화면에는 풍성한 상품광고 사이에 이디오피아에서 기아에 죽어가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어른들과 노인들이 비쳐져 보는 이들의 가슴을 찢는다. 굶주려 가죽과 뼈만 남은 그들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수 없다. 아프리카의 한나라 이디오피아에서 만도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이 1천만명이나 될것이라고 한다.
화려한 상가에서 크스리머스 선물을 품안에 가득 사들고 웅성대는 행복한 모습과 뜨거운 뙤약볕에서 뼈만 남은 아이들이 역시 가죽만 남은 엄마의 품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아프리카 사막의 모습은 너무나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강자와 약자, 행복한 사람과 비참한 사람, 삶과 죽음과의 대조를 의미한다.
잘사는 나라,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디오피아의 사막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그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딱하고 가엾은 일이지만 그것은 남의 나라의 일, 보기에 괴롭지만 그것은 남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돈이 있는데 내가 크리스머스를 화려하고 즐겁게 지낸다고 해서 안될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가슴 한구석 깊은 곳의 도덕적 양심은 외친다. 낭비와 사치를 누리는 사람이 있는데 반해 한편으로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한 인간사회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음을, 지구 한곳에서 화려한 크리스머스 축제가 있을때 또 한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야하는 인간사회에는 근본적으로 모순이 있음을, 이러한 잘못·모순·부당함을 지켜보고만 있는 하느님이 너무나 가혹하다는 사실을.
신문과 TV로 이디오피아에서의 기아 상황을 알고서도 크리스머스라고 흥청대고 즐기는 우리들에게서 인간의 인간에 대한 냉혹성, 무자비성을 스스로 발견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위선성을 드러낸다.「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고 하지만 만약 「예수」가 오늘날 살아있다면 그는 크리스머스트리를 마련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크리스머스를 축하하지도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진정 크리스머스를 축하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세상에 단 하나의 굶는 자가 있을 때 우리는 그와 함께 굶고자 하지 않을수 없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와 함께 「예수」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도덕적 양심은 단 하나의 불행한 사람이 있는한 아무도 진정 행복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우리는 물론 부처의 자비심을 그대로 따를수도 없고, 「예수」의 사랑을 따라갈 수도 없다. 우리는 역시 속인이며 성자가 못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남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보살처럼 스스로 찾은 극락을 잠시 보류할 수 없으며, 남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처럼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버리고 길잃은 한마리의 양을 찾지 못한다. 우리는 다같이 아직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자신만의 극락과 사람에만 집착한다.
그러나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또한 우리는 동물적 무관심과 단순한 생물로서의 이기적 욕망을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는 잠재적으로나마 불교적 자비심과 기독교적 사랑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 내 작은힘으로 그 머나먼 곳의, 그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한 국가가 자기국민들을 희생시키면서 알지도 못하는 나라, 더구나 이념을 달리하는 딴 나라의 국민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이 냉혹한 인간. 그리고 인간 사회의 현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적어도 남들을, 딴 인간들의 고통을 의식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사치, 우리의 낭비에 대해 반성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다시 한번 크리스머스의 참다운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잠깐이라도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 모든 생명이 하나같이 귀하다는 사실, 모두가 인간가족임을 의식해야 하며 미흡하나마 그리한 의식에 따라 행동을 갖추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가 못하더라도,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지 못하더라도, 모든 국가가 그렇지는 않더라도, 기아에 죽어가는 사람들 틈에 끼여 낯선 아프리카의 사막에서 그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병을 고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아직도 남겨준다.
최소한 이러한 사실을 의식함으로써만 한 개인은 새삼 자신의 인간성을 인정할 수 있으며, 한 국가는 자기네 문명을 다소나마 자부할 수 있다.
크리스머스와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는 다시한번 우리의 인간성과 문명성을 재확인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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