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치인만 존재하도록 …” 대통령 발언 두고 정치권 촉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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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25일 국무회의에서 5793자짜리 원고를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200자 원고지 29장 분량의 원고를 읽는 데 16분이 걸렸다. 이 중 12분 이상이 정치권에 대한 비판이었다. 원고엔 “선거를 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후엔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 “(국회의) 저의(底意)를 이해할 수 없다”와 같이 강한 수위의 표현들이 계속 등장했다. ‘구태정치’ ‘심판’ 같이 좀처럼 쓰지 않던 단어도 나왔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 정도의 원고는 박 대통령 외에는 쓸 사람이 없다”고 했다.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박 대통령의 표정은 상당히 단호했다”며 “정치권을 비판할 때는 목소리 톤이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고 전했다. 특히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목소리가 가장 높았다.

 이날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 및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총선을 비롯해 각종 선거 지원에 나섰던 점을 떠올리면서 ‘배신의 정치’를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저도 그렇게 당선의 기회를 달라고 당과 후보를 지원하고 다녔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정치적·도덕적 공허함이었다”면서 여당 정치인들의 선거 전과 후가 달라졌다고 비판했다. 자신이 총력을 다해 당선되도록 지원했지만 선거 후에는 제대로 여당이 뒷받침을 해주지 못했다는 불만이 깔려 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기가 막힌 사유들로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한 법안들을 열거하는 것이 어느덧 국무회의의 주요 의제가 돼버린 현실 정치가 난감할 따름”이라고도 했다.

 한 청와대 참모는 “그동안 여당 지도부에 대해 쌓인 불만이 오늘 폭발한 것 같다”며 “박 대통령은 경제 살리기 법안들의 처리가 지연되는 와중에 그나마 행정 입법(시행령)을 차선책으로 활용해 왔는데, 그것마저 여당이 흥정하듯 내줬으니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다른 관계자는 “이번에 위헌 논란이 다분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되는 것을 보고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이 ‘집권’만 하려 하지 ‘여당’이긴 포기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제 우리 정치는 국민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만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까지 했다. 단순히 야당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여야 구분 없이 개혁 대상으로 규정한 발언이다.

 국회 일각에선 “박 대통령이 당적 이탈을 염두에 두거나 정치판을 크게 흔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여권 핵심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여당뿐 아니라 국회 전체와의 관계 악화를 감수하면서까지 강수를 둔 것은 국정 운영에 있어 더 이상 국회에 밀리는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일 뿐”이라며 “경고 메시지 이상의 뜻은 없다”고 일축했다.

신용호 기자 nov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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