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버린 "재벌체제 인정 못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SK사태'가 한국의 재벌체제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SK㈜의 대주주인 소버린 자산운용과 소액주주연합회 등이 4일 "SK그룹 손길승 회장이 SK글로벌을 반드시 살리겠다고 밝힌 데 대해 우려를 표시한다"면서 그룹 차원의 SK글로벌 지원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룹은 법적인 실체가 있는 조직이 아니며▶SK그룹은 SK㈜의 대주주가 아니므로 SK㈜의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여러 계열사를 거느리면서 사실상 한 회사처럼 운영돼 왔던 재벌체제를 인정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SK㈜ 주주들이 던진 것이다.

◆재벌이냐, 독립기업이냐=채권단과 SK그룹은 지난 3일 'SK글로벌 살리기'에 간신히 합의했다. SK㈜가 글로벌에서 받을 빚 8천5백억원을 출자전환하고, SK텔레콤 등 나머지 계열사들도 글로벌이 앞으로 4천5백여억원의 이익을 내도록 도와준다는 조건이다.

채권단과 그룹 측이 이런 조건에 합의한 밑바탕에는 SK글로벌이나 SK㈜ 모두 'SK그룹의 일원'이 아니냐는 인식이 깔려 있다. 사실상 한 회사이므로 서로 도와주는 게 맞지 않느냐는 논리다.

글로벌 정상화를 위한 채권단과의 협상을 그룹이 주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나 소버린은 SK㈜를 SK그룹의 일원이 아닌 개별 독립기업이라고 보고 있다. 그룹은 법적인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SK㈜와 글로벌은 엄연히 다른 회사이고, 그룹은 법적인 실체도 없는데, 어떻게 그룹이 '글로벌 살리기'협상을 주도하고, SK㈜가 글로벌을 도와줄 수 있느냐는 논리다. 소버린이 SK㈜의 이사회 이사들에게 그룹과 채권단의 합의에 관계없이 주주 이익을 대변해 행동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검찰이 SK의 오너인 최태원 회장 등을 배임죄로 구속한 것도 소버린처럼 재벌체제를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검찰은 공판과정 내내 "SK증권을 살리기 위해 '아무 관련이 없는'SK글로벌에 손실을 입혔다"고 주장했다.

산업연구원 김용열 기업정책실장은 "재벌체제를 부정하면 글로벌은 청산돼 이 기업 주주들이 크게 피해를 보고, 재벌체제를 인정하면 SK㈜의 주주.이사들이 피해를 볼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서 "한국의 재벌구조는 막다른 기로에 서 있다"고 말했다.

◆책임한계 어디까지='SK글로벌 살리기'는 주주의 유한.무한 책임 논쟁도 제기하고 있다. 채권단 측은 "SK글로벌이 부실화된 것은 그룹의 쓰레기 하치장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라면서 그룹 차원의 무한책임론을 강조한다. 반면 소버린은 재벌체제를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SK㈜의 유한책임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여연대 측도 "채권단의 요구는 SK그룹 계열사의 부당한 지원을 강요하는 것"이라면서 "개별기업의 부실이 그룹 전체로 확대돼선 안된다"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진보진영 학자들의 모임인 대안연대 정승일 정책위원은 "중요한 것은 국민경제 전체의 활력"이라면서 "재벌체제 논의나 글로벌 정상화 등은 이런 큰 틀 속에서 진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김영욱.정현목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