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의 시어머님-이영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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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내 어렸을적 우리집은 식구가 많아 방이 내차례까지 오지 않고 할머니와 한방을 쓰며 자랐다. 할머니는 늘 이불을 덮고 아랫쪽에 앉으셔서 대견스런 눈으로 장손녀인 나의 동작을 바라보고 계셨는데, 아들·며느리보다 같은 방에 있는 나를 통해 세상의 변화를 느끼시곤 하셨다.
내가 졸업하고 첫 직장에 출근하며 스타킹을 신을때 할머니는 당신의 흐릿한 눈으로 보시면서 신었는지 안신었는지 모르는 양말이 신기하셔서 파안대소하셨고, 아침이면 늘 「유리양말」신은 내 다리를 쓰다듬으시며 참 좋은 세상이라고 흐뭇해 하셨다. 또 TV가 처음 보급되었을때 저렇게 조그마한 상자에 어떻게 사람이 몇씩이나 들어앉아서 얘기들을 하느냐고 하셨다. 웃다 지친 동생이 할머니가 귀엽다고 했다가 아버지한테 호되게 야단맞을때도 할머니는 그저 신기하고 좋은 세상이라고 감탄만 하셨다.
그토록 좋은 세상을 더 오래 사시지 못하고 할머니는 돌아가신지 까마득하고 결혼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또 시어머니께서 칠순이 넘으셨다. 요새들어 부쩍 어깨가 구부정해지셔서 큰 아이가 갖고 노는 변신 로보트를 볼때나, 작은고모가 생신에 사다 드린 앙고라 스웨터가 입은것 같지 않게 가벼워 좋으시다며 흥거워 하실때 나는 그만 가슴이 철렁해졌다. 몸으로 그토록 애써서 기르신 아범과 당신 생명보다 더 귀히 여기시는 손자와 같이 좋은 세상을 끝도끝도 없이 누리셔야 할텐데. 때때로 마음속으로 시어머니께 불만을 품었던 이 못난 며느리가 다 못 드린 사항을 두고두고 받으셔야 할텐데. 방으로 들어가시는 시어머니의 하얀 뒷모습이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서울강남구신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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