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8)-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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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리하여 안창호가 최남선을 사회에 열심히 추전한것을 알수있는데 육당도 도산에 대한 사모와 존경이 대단하였다. 즉『소년』제3년 2권의 책머리에 『삼가 이시집을 나의 가장 경앙하는 도산선생앞에 올려 해외에서 여러가지로 사모하고 염려하는 정을 표하옵나이다. -동경에서 공육』이라고 하여 육당은 그의 유명한 『태백산시집』을 도산에게 올리고 있다.
이것을 보아 육당과 도산과의 깊은 인연을 짐작할수 있고 여사단에서 해방후에도 육당을 깍듯이 대접해온 까닭을 알수 있다.
도산은 민족의 영원한 번영과 영광을 염원하면서 청년학우회운동을 개시하였으나 한일합방의 비운이 닥쳐 1910년 7월 개성에서 체포되었다. 뒤에 잠시 석방된 틈을 타 국외로 탈출 할것을 결심하고 마포에서 배를 타고 장연에 이르러 거기서 중국의 소금배를 타고 청도로 갔다.
한일합방으로 모든 결사와 신문이 해산당하자 청년학우회도 해산당했다. 이것이 다시 미국에서「흥사국」이 되어 부활되었고 국내에서는 수양동우회란 이름으로 십여년동안 계속되다 남총독시대 동우회사건으로 40여명이 검거되고 수양동우회 해산되었다.
신문관에서는 잡지 『소년』을 간행하는 외에 외국서적으로「라미」부인의 『불쌍한 동무』,「스토」부인의 『검둥이의 설움』과 그밖에 『로빈슨표류기』 『걸리버 유람기』등을 번역 발간하였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큰 출판사업을 개시하였는데 그것은 조선광문회의 발족이었다. 신문관은 그 이름같이 새로운 문화를 수입해서 뒤떨어진 우리나라 문화를 향상시키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자칫하면 제것, 제 좋은것, 제 좋은 고전을 소홀히 하기 쉬운 경향이 없지도 않았다. 이때문에 최남선은 일찍부터 자꾸 없어져가는 옛날 문헌을 다시 찍어내 우리의 고전을 보존하는 운동을 일으켜나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신문관안에 「조선고아문회」를 새로 발족시켰다. 1910년이엇다.
조선광문회는 『조선구래의 문헌·도서중 중대하고 긴요한 것을 수집·편찬·개간하여 귀중한 문서를 보존·전포함을 목전함』이라고하여 우리나라 사기·지지를 비롯하여 전장·가사·시문·경전·교학등 온갖 방면에 걸친 권위있는 저술을 선택해 간행하자는것이었다.
그러나 이사업은 막대한 경비를 필요로 하고 수입이라고는 한푼도 없는 순전한 소비사업이어서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손대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사업을 시작한 해가 1910년이어서 나라가 일본한테 먹혀버린 해였다.
일본사람들은 해마다 조선에 건너와 귀중한 문화재를 자꾸 가져가기 시작하였다. 귀중한 책을 싸게 사가기도 하고 뺏어가기도해서 우리나라 고서가 자꾸 없어져갔다. 이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수 없어 최남선은 자신의 재산의 힘을 돌보지 않고 이 거대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광문회의 주요간부는 유근 장지연 이인승 김교헌등이었고 최초로 간행한것이 동국통감과 열하일기였다.
이어 사전과 문법을 정리하는 사업으로『신자전』을 유근·이인승의 감독으로 간행하였고 이어서 주시경을 책임자로 하여 『조선어사전』의 편집에 착수하였다. 오늘날의 한글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우선 어휘를 수집하기 시작하여 주시경아래 김요봉과 김여제가 조수로 붙어 이일을 진행해나갔다. 『신자전』하나만도 유근과 이인승이 편집책임자가 되고, 그아래 광문회전직원이 총동원되어 달라붙어 다섯해가 걸려 완성하였다니 그 노고를 짐작할만하다. <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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