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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막연한 공포’에 휘둘리지 않는 과학기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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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한별 기자 중앙일보 Product 담당
외국 기자가 9일 세계과학기자대회(WCSJ)에서 메르스 관련 질문을 하고 있다. [WCSJ 조직위]
김한별
사회부문 기자

지난 9일 오전 7시30분. 서울 코엑스 컨벤션홀이 외국 기자들로 꽉 찼다. 아침 식사도 못하고 온 이도 많은 듯했다. 9~11일 열리는 세계과학기자대회(WCSJ) 참가자들이었다. 호주에서 온 한 기자는 “개막식 전 한국의 메르스 사태 관련 긴급 토론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왔다”고 했다.

 한국의 바이러스 전문가와 감염내과 전문의의 발표가 끝나자 질문이 쏟아졌다. “병원 감염이 많은데 의료진이 예방 수칙을 제대로 지켰나?” “공기전파가 아니라면 왜 환자와 멀리 있던 사람까지 감염되나?” 발표자들은 연단을 내려온 뒤에도 외국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한데 특이한 점은 그들 가운데 요즘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마스크 쓴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조직위는 “메르스 때문에 대회 참가를 포기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중국·홍콩·필리핀에서 다섯 명이 불참했는데 그중 셋은 의사였다. 자국 방역 정책에 따라 한국을 다녀가면 2주간 진료를 못 보게 돼 참가를 포기했다고 한다.

 한국 정부의 미숙한 초기 대응을 비판하고 “한국 내 감염 경로에 의문이 많다”는 외국 과학기자들. 이들은 왜 ‘겁 없이’ 한국에 왔고, 마스크도 안 쓰고 돌아다니는 걸까. 일본 아사히신문의 다카하시 마리코(高橋<771F>梨子) 편집위원은 “가족들이 말렸지만 뿌리치고 왔다. 난 과학기자다”고 말했다. 그는 도쿄대 물리학과 출신으로 이 신문에서 36년간 과학을 담당한 베테랑이다. 아프리카에서 메르스보다 더 위험하다는 에볼라 취재를 했던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의 마틴 엔서링크 기자는 “지역 내 감염이 없다면 길거리에서 마스크를 쓸 이유가 없다. 학교 휴업도 괜히 공포심만 키울 뿐”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얘기를 종합하면 과학에 근거한 ‘합리적 의심’과 ‘막연한 공포’를 구분해야 하며, 그것을 돕는 게 전문가와 방역당국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어땠나. 보건당국은 확진 환자가 속출하는데도 오랫동안 병원 이름을 숨겨 공포를 조장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2m 안에서만 옮는다” 또는 “청소년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장담했다가 불신을 자초했다. 교육당국은 세계보건기구(WHO)가 괜찮다는데도 학교 휴업을 강행했다. 그 결과 온갖 ‘메르스 괴담’이 돌았고 마스크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외국 기자들의 조언과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리처드 스톤 ‘사이언스’ 국제뉴스 에디터는 “이 사태가 종료되면 이번 대응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메르스 징비록’을 꼭 만들라는 그의 말을 정부가 새겨듣길 바란다.

김한별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