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들의 죄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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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제하에서 선열들은 하나같이「더러운 죄명」을 쓴 채 희생되었다. 총독부 요인을 암살했으면 살인이요, 독립선언서를 반포했으면 출판법 보안법 위반이다. 군자금을 모집했을 때의 죄명인 강도·공갈 사기취재같은 따위는 부랑자가 술값을 강취했을때 붙는「파렴치한 죄목」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방40년에 그분네들을 「파렴치범」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선열들은 국가에서 응분의 포장을 받았고, 민족의 경모도 받아 왔다. 하지만 투쟁기록의 산일로 포상에서 제외된 경우라면 어떨까? 남은 것은 사기·공갈같은「더러운 죄명」과, 독립운동을 했다는 고로들의 증언뿐인 것이다.
그 고로들마저 사망했을때 후손들이 「파렴치범의 자손」으로 오해되지 않는다는 보증이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차라리 2차적인 문제라 할 수도 있다. 일제의 그따위 죄명을 그대로방치해 둔다는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일제의 식민지배를 긍정·승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법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서 운용되지만, 우리는「일제하의 민족정기에 위배된 판결과 결정」에까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적용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재심으로 그 같은 판결·결정을 파기한다는 것은 국가의 의사로 일제의 지배를 공식 부인함이요, 선열들의 때를 벗겨드리는 민족적 당연한 의무이다. 법이 추구하는 정의의 실현일뿐더러, 민족정기의 함양과 진작을 위해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였던 것이다.
왕조시절에 백정 둘은 소위 화외방임으로 갓을 쓰지 못했고, 담뱃대로도 피우지 못했다.
갑오개혁으로 사민평등이 선포되자 백정부락에서는 갓과 담뱃대를 젯상에 차려 놓는 묘한 풍습이 유행했다. 죽어서나마 천민의 한을 풀어 보시라는 자손들의 효성이었던 것이다.
옛날에 천민들조차도 이러했거늘, 우리는 해방 4O년에 선열들의「억울하고 더러운 죄명」을 아직껏 그냥 방치해두고 있다.「일제하 민족정기에 위배된 판결·결정을 무효로 한다」는 명문은 40년전 헌법으로 명시했어야할 조항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임종국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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