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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던 친구같던 맛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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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호 28면

해장국과 뼈다귀. 해장을 하면서도 술을 다시 부르는 조합이다. 다행히 뼈다귀는 오후 3시 이후부터 판다.
▶영춘옥 : 서울시 종로구 돈화문로 5가 길13(돈의동 131) 전화 02-765-4237 24시간 연중무휴.
해장국 7000원, 뼈다귀 2만7000원, 곰탕 8000원.

하루가 다르게 새롭고 화려한 음식점이 생겨나는 세상. 오히려 오래된 식당을 찾는다. 우리 곁을 오래 지켜온 식당에는 깊은 멋과 맛이 있다. 품어온 세월만큼 쌓인 진정성은 요즘 음식점이 흉내 내기 어렵다. 새로운 맛, 자극적인 맛에 둘러싸여 있다가 생각이 나서 찾아가면 변함없는 친근한 맛으로 따뜻하게 맞아 준다. 마음부터 푸근해진다. 빠르게 바뀌는 세상을 허덕이다가 문득 옆을 돌아봤을 때 “나 아직 여기 있어”하면서 어깨를 토닥여주는 오랜 벗 같다.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60> 영춘옥 해장국

종로 3가 옛 피카디리 극장 옆 골목에 ‘영춘옥’이라는 오래된 곰탕집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43년에 개업했다. 충청도에서 상경한 고 전수만, 김씨(옛날에는 성만 있고 이름은 없는 여자들도 있었다) 부부가 고향 마을 이름을 따서 상호를 짓고 시작했다. 그 분들께서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는 며느리 차정애(76)씨가 물려받았다.

차씨는 잘나가는 대학생이었다.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다. 부산에서 올라와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친구를 만나러 온 남학생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화여대 학칙은 결혼을 하면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이 놀라운 학칙은 2003년에야 폐지됐다). 학교까지 포기하고 들어온 소중한 며느리에게 시어머니 김씨는 식당 일을 아예 못하게 했다. 그저 어깨 너머로 지켜보면서 배우다가 시어머니가 연로해진 다음에야 일을 시작했다. 물려받아 운영한 지 벌써 40여 년이 되었고, 2~3년 전부터는 아들 전승민(47)씨가 어머니를 도우면서 3대째를 준비하고 있다.

깊은 역사만큼 오랜 단골이 많다. 3대가 함께 다니는 손님도 있을 정도다. 옛날 피카디리 극장과 단성사가 있던 이 지역은 종로에서도 가장 번성한 곳이었다. 당시 이 부근을 드나들던 내로라 하는 유명인들은 이곳의 해장국을 특히 좋아해서 일부러 새벽부터 찾아와 먹고 가곤 했다.

차씨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단골은 ‘장군의 아들’ 고 김두한씨다. 몇 해 동안 거의 매일 아침에 운동을 다녀오면서 해장국을 먹으러 들렀는데, 아주 입담이 좋았다고 한다.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찌나 재미있는지 다른 좌석에 있던 손님들까지 합석해서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가게가 좁은 것이 문제였다. 그 이야기를 듣느라 다 먹고도 안 가고 앉아있는 손님들 덕분에 식당 주인에게는 재미있으면서도 동시에 골치 아픈 단골이 되었단다.

이곳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역시 해장국이다. 쓰린 속을 매운 자극으로 더 강하게 마취시키는 ‘이열치열’식이 아니라 친절한 누이처럼 부드럽게 어르듯 달래주는 온화한 스타일이다. 고기와 뼈를 넣고 끓인 곰탕 국물을 바탕으로 우거지와 콩나물, 선지를 넣고 맵지 않게 끓여냈다. 오랜 세월 동안 고기를 다루고 탕을 끓여온 노하우 덕분에 국물 맛의 균형이 잘 잡혀있다. 고기 국물이 기름기 하나 없이 깊고 개운하면서 우거지와 콩나물이 달콤하고 시원한 맛을 더해 일품이다. 한번 국물을 떠 넣기 시작하면 그릇이 비워질 때까지 정신없이 들이키게 된다. 고기가 없고 자극적인 맛이 없어도 충분히 맛있고 속이 편안해지는 고급 해장국이다.

살점 붙은 ‘뼈다귀’ 메뉴는 술도둑
‘영춘옥’에서 사실 가장 인기가 높은 음식은 ‘뼈다귀’라는 메뉴다. 국물을 내기 위해 쇠뼈다귀를 삶는데 그 중에서 살이 붙은 것을 골라 서비스로 내주다가 정식 메뉴가 됐다. 쇠고기는 귀해서 원래 뼈다귀에 붙어 있는 살이 많지 않다. 매일 열 마리 넘는 분량의 쇠뼈를 삶지만 나오는 양은 얼마 안 되어서 빨리 떨어지기 일쑤라고 한다. 볼품은 없어 보여도 뼈를 지탱했던 근육과 연골, 힘줄, 근막 등이 섞여 있는 뼈 고기는 구수하면서도 씹히는 맛이 별미다. 워낙 술도둑이어서 손님 많은 시간에는 소주를 한 병만 마시겠다는 서약을 받아야만 내주는 콧대 높은 음식이기도 하다.

일상이 피곤하고 자극적인 음식들에 지쳤을 때는 ‘영춘옥’ 같은 오래된 식당을 권한다. 잊고 있던 마음 편한 친구가 그곳에 있다. 기억 속의 편하고 깊은 맛이 위안처럼, 축복처럼 다가온다. 따라오는 옛날 추억과 이야기들은 기분 좋은 덤이다.

주영욱 음식·사진·여행을 좋아하는 문화 유목민. 마음이 담긴 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한다. 경영학 박사. 베스트레블 대표. yeongjyw@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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