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韓日 '셔틀 외교' 가능하려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며칠 뒤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를 만난다. 몇 주 전 워싱턴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와 달리 긴장감 없는 회동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하지만 더욱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그동안 북한이란 동족을 얼싸안겠다는 의지 탓에 따질 것 많은 상대에게 당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 방문시 우리 대통령의 조금 '오버'한 언행 덕에 북한을 향한 경고성 공동발표가 가능했다.

그런 면에서 북핵 처리에 대해 미국과 한 목소리로 '강경조치'를 외치는 일본과 부딪칠 이유도 사라졌다. 원론적으로 보자면 그렇다.

정작 북을 향해 구체적인 압박조치를 취하고 이에 대해 북한이 막무가내로 나올 경우 워싱턴과 도쿄(東京)가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또 한.일 양국이 북핵을 놓고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칼자루 쥔 미국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10년 넘게 경기침체를 겪으며 위기의식과 무력감에 익숙해진 일본에 북한만큼 자극과 카타르시스에 도움 되는 상대가 없다. 일본 영공으로 미사일을 쏘아올려 일본 열도를 경악시켰던 북한이다.

지난해 9월 북.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인 납치 사실을 '통 크게'시인해 일본 사회를 분노케 한 것도 북한이다. 게다가 심증은 가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어 끙끙대던 핵개발 사실을 온 천하에 공개하며 일본을 긴장시키고 있는 상대 역시 북한이다.

그런 북한 덕에 일본은 밀린 숙제를 단번에 해치웠다. 첩보위성을 발사하고 전쟁시 동원체제를 염두에 둔 입법조치까지 아픈 이빨 뽑듯 통과시켰다.

이런 일본을 우리 대통령이 만난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에선 북핵이든 미사일 위협이든 원론적 합의 이외에 달리 나올 얘기가 없다. 구체적 대안까지 욕심낸다면 양측 모두에 긁어 부스럼이 될 공산이 크다.

또 상당기간 대북 압박이 세 나라의 공통 전략일 수밖에 없다는 데 이미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대통령이 조심스레 챙겨야 할 일이 있다. 과거사 문제다. 그렇다고 구태의연한 얘기를 들먹이거나 정색하고 따지라는 말은 아니다.

애초 일본이 우리 입맛대로 과거사 처리에 나서길 기대하는 건 무리다. 반세기 넘게 되풀이됐던 문제다. 말하고 뒤집고, 또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게 일본이다.

그래서 경제대국이면서도 정치대국대접을 받지 못한다. 북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군사현대화가 일본 사회의 '우경화(右傾化)'란 거북한 소리를 듣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결국 이런 게 모두 일본의 한계다.

사실 코앞에 닥친 안보문제와 역사 오랜 사안을 한 자리에서 꺼내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비켜갈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

그래서 대통령은 "일본문화에 익숙해진 한국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일본에 대한 유감이 선배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통계를 거론하며 과거사 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세련미를 보여야 한다.

이게 결국 양측을 위한 길이다. 또 역사해석을 공유하고 과거의 족쇄에서 해방될 수 있을 때 진정 미래를 향한 한.일관계가 가능하다는 거룩한 얘기 역시 일본엔 약(藥)이 된다.

그리고 양국 정상이 "언제 어디서나 필요할 때 만나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겠다"는 '셔틀 외교'의 시작을 선언할 수 있다면 양국의 특수관계를 재확인하는 데는 그만이다.

다만 한국 지도자의 일거수 일투족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일본 언론의 관행 탓에 정상회담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단어 선정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직설화법에 능한 상대라서 더욱 그렇다. (도쿄에서)

길정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