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0)|제80화 30년대의 문화계(7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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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그뒤 상허·종명·유영·지용등이 몇번 만났는데, 여러가지 문제가 별 의견차이 없이 잘 합의되었고, 회원수 문제는 8명은 좋지 않으니 9명으로 한사람만 더 넣고 끊자는것이 상허를 비롯한 다수의 의견이었으므로 그렇게 하기로 하였는데, 나는 유치진을천거하였다. 영화인 김유영이 있으니 연극인도 있어야 한다는 내 생각에서 유를 천거한 것이었다.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종명·유영이 찬성해 유치진으로 낙착되었다. 이리하여 상허·지용·종명·유영·기림·무영·이효석·유치진, 그리고 나까지 합해 9명이 되었다.
회명 문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왔지만 총회때 의논해 결정하기로 했다. 7월이 지났으니 이효석이 여름방학으로 상경 하는것을 기다려 7월 스무날께 전원이 다 모이는 총회를 열기로했다.
기림·무영은 별문제 없이 승낙하였지만 이효석이 앞서 도서과 취직일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으므로, 또 좌익측에서 욕을 먹는다고 사양하는 것을 김유영이 극력 무마해 입회시켰고, 유치진이 싫다고 하는 것을 내가 억지로 입회시켰다. 이렇게 사양하는사람이 있는가 하면 박태원과 이상같은 사람은 자기들을 안 넣어 주었다고 불평하고 다니기도 했다.
회원들의 면모를 본다면 이종명·김유영은 앞서 이야기했고, 상허 이X준은 강원도 철원이 고향으로 그의 부친이 항일운동을 하다가 순국했다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했고 지사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휘문학교에서 지용의 후배였지만 지용은 항상 상허를 추죵했고, 해방후에도 상허가 지사적 영웅심 때문에 문단의 헤게모니를 쥐려고 좌익으로 갔을 때에도 지용이 상허를 따라갔다. 두사람은 어느모로 보든지 프롤레타리아와는 아무 관련이없는 귀족 취미의 사람이었다. 상허로 말하면 골동서화를 좋아해 돈만 있으면 이것을 사들였고, 성북동 집의 차림차림이 프롤레타리아와는 무릇 인연이 먼 세련된 고급 취미의 맨새를 풍기고 있었다.
선술집은 마음으로부터 혐오했고 나중에 『문장』 잡지를 할 때 보면 고급요리집만 좋아하였다.
음식도 맛있는 것만 쪽쪽 가려서 먹었고, 일상생활이 무엇 하나 구수하고 텁텁한 서민적인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귀족적인 고급 취미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북쪽의 그들과 어울렸는지 모를 일이다.
그쪽으로 간뒤 어떤 글이 말썽이 되어 어디로 쫓겨갔느니, 어쨌느니 하고 뜬 소문이 많았지만 사실이 어땠는지 알길이 없다.
해방뒤 임X란 사람의 꾐에 빠져 문단의 헤게모니를 쥐고 왕좌에 앉아보겠다는 영웅심 때문에 그렇게 된것인데, 여기 있었더라면 실력을 마음대로 발휘해 좋은 작품을 많이 썼을 것이고 자신을 위해서나 문단을 위해서나 좋았을 것인데 유감스런 일이라고하지 않을수 없다.
한편 지용으로 말하면 평소에는 아주 온순한 사람이고 새벽마다 명동성당에 미사를 올리러 다니는 착실한 천주교 신자였는데어느틈에 그렇게 되었는지 불가사의한 일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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