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3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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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잘 갈아 둔 낫을 들고 친구와 나, 그의 아버지, 마을 남자 두 사람 그렇게 다섯이서 논벌로 나아갔다. 그야말로 황금 벌판이 눈앞에 펼쳐져 바람에 물결치고 있었다. 허리를 굽혀 한 손으로 볏단을 움켜쥐고 비스듬하게 낫으로 베어 냈다. 적당한 묶음이 되면 논고랑에 뉘어 놓곤 했다. 친구와 다른 이들은 정말 너무도 능숙하고 빨리 나아가는데 나는 몇 번 베고는 허리가 아파서 잠시 섰다가 다시 굽히곤 했다. 나중에 요령이 생겨서 쭈그리고 오리걸음으로 훑어 나가는 식으로 베어 냈다. 가을 농촌 인심은 역시 풍족해서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참을 내왔다. 참을 먹고 나서 점심때가 금방 찾아 왔는데도 배가 너무 고팠다. 점심 광주리가 나왔는데 일에 참례한 다른 이웃 남자들 가족까지 함께 나와 들밥을 먹었다. 친구와 나는 핑계 김에 닷병들이 막걸리 한 병을 다 마셔 버렸다. 막걸리가 순한 술 같아도 한번 취하면 쉽사리 깨지 않고 알딸딸하게 오래 간다. 논두렁을 베고 얼굴에 수건 덮고 한잠을 자고 나면 사지가 부드럽게 풀려 있다.

일이 사흘 만에 끝나자 친구 녀석은 아버지 눈치가 보였는지 어디 놀러 가자고 나를 끌어 냈다. 근처에 제법 풍치 있는 절이 있다고 하더니 그저 평범한 산사가 있었다. 주변은 논밭이고 무릉산이라고 우리나라 어디에나 있음 직한 산자락 아래 작은 언덕을 등지고 장춘사라는 절이 있었다. 경내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절 아래 마을 어귀에 있는 주막에 걸터앉아서 역시 또 막걸리를 마셨다. 술이 어지간히 올랐는데 누군가 들어오더니 내 친구 녀석과 아는 체를 했다. 얼굴이 하얗고 샌님처럼 얌전해 뵈는 친구였다. 한잔 들라고 했더니 절에 내일 공사가 있어서 일꾼들 참술을 사러 왔다고 했다. 그는 웅이라고, 나와 앞으로 인연을 갖게 될 사람이었다.

추석을 사나흘 앞두고 나는 그 녀석의 집에서 떠나기로 한다. 우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절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기 시작했고 밥상 앞에서도 녀석까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밥을 떠먹기만 했다. 떠나려 할 때 그의 아버지가 내다보더니 내 배낭 속에 챙겨 넣었던 군용 텐트를 가리키며 그걸 주고 갈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아마도 나뭇짐이나 곡물 등속을 덮어 놓는 데 쓰려고 했던 것 같았다. 말없이 텐트를 꺼내어 주었더니 배낭이 푹 쓰러질 정도로 텅 비어 버렸다. 녀석은 문앞으로 열 걸음이나 따라 나오는 시늉이더니 우물쭈물 말했다.

-멀리 몬 나간다. 마 집에 드가뿌라.

나는 그냥 손을 저어 보이고는 돌아섰다. 살림이 팍팍해서 그렇겠지 하면서도 목소리는 시원시원하게 큰데 작은 이해관계에 철저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나는 다시 마산 쪽으로 나와 정처도 없이 진주로 향했다.

하루 종일 진주 시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황혼녘까지 진주성이며 남강 촉석루 부근을 돌아다니다 남강의 지류인 천변에 있던 허름한 여인숙에서 묵었다. 이튿날부터 다시 일거리를 찾아 시내를 배회하다가 전봇대에 붙은 구인광고를 보게 되었다. '빵'이라고 크게 쓴 글씨가 눈에 띄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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