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국민소득 1만달러' 넘어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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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경제발전 단계에서 국민소득 1만달러는 경험적으로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하는 분기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선진국에서도 국민소득이 이 수준에 이르렀을 때 국민의 욕구가 다양한 형태로 분출됐다.

복지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수요가 증가한 것이 공통적 특징이다. 사회 각 계층 생활양상의 변화와 새로운 생산구조 구축의 필요성을 의미한다. 정치제도의 변화가 수반됐음은 말할 나위 없다.

변화란 사회계층간 이해관계의 상충을 내포하며, 결국 사회적 통합의 바탕 위에 지속성장을 달성한 국가는 선진국으로 도약했고, 그렇지 못한 국가는 선진국 문턱에서 주저앉았음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 성장모델 창출 실패의 교훈

우리도 이미 1990년대 중반 1만달러 분기점에 서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했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아시아 경제위기라는 특수한 대외적 환경이 그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변명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정치지도자와 국민이 변화를 감당할 능력을 갖지 못한 것이 더 큰 요인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천신만고 끝에 다시 1만달러에 도달했는데, 동일한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다. 우리는 지금 도약할 준비가 돼 있는가.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의 성장모델을 창출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경제성장이 멈추는 대가를 지불하고도 얻을 만큼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데에 국민이 동의할까. 경제성장은 저절로 이뤄진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국민은 없는가.

경제운용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형태의 구분이 가능하다. 총량적 목표 달성을 위한 전통적인 경제정책들이 전자에 해당한다. 시장경제원리에 부응하는 금융통화정책, 건전한 재정규율, 공정하고 능률적인 조세징수, 경제적 동기를 보장하는 재산권제도 등을 들 수 있다.

한때 우리 귀에 익숙했던 개념들이다. 한편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 소득분배의 형평성 제고, 환경 보호, 사회차별의 시정 등은 후자에 속한다. 지금 우리 귀에 들리는 개념들이다. 이 두 요소가 적절하게 배합돼야 조화롭게 경제성장이 이뤄진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소득 1만달러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후자가 시장경제 정착의 걸림돌이 되는 것을 방지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자의 토대가 허물어지면 후자만으로는 성장을 이루기 어렵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난 정치적 결정은 언제나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독일 통일이 대표적 사례다. 암시장에서 7대1 정도의 동.서독간 화폐교환가치를 임의적으로 1대 1로 정한 것은 정치적 결정이었다.

독일이 통일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근본적 요인인 것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시장은 분명 어떠한 결정이든 그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치적 결정이 경제행위와 독립적 관계에 있을 수 없다.

경제는 시장경제 원칙에 따라 엄격하게 움직인다. 그렇게 건실하던 독일 경제도 지금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서 시장경제의 무서움을 배워야 한다.

*** 복지가 시장경제 발목 잡으면 …

부가가치 창출이 경제운용의 핵심 개념이 돼야 한다. 현재 추진하고 있는 국가적 프로젝트의 실천적 청사진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 "G10국가로의 도약"과 같은 가치중립적이지만 피부에 와 닿는 명료한 슬로건을 내걸고, 선진국 경험에 비추어 우리가 개혁해야 할 과제를 선정하는 작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다수 국민의 동의를 구할 수 있는 목표이며, 경제전문가가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므로 실익보다 명분.이념에 치우친 논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케인스의 말대로 우리는 이미 사라져버린 경제학자의 사상적 노예 또는 학구적 잡문의 포로일 수 있다는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고 싶은 그 어떤 가치가 저성장.실업.인플레 등을 감내해야 한다면 실제로 그러한 대가를 치르고 그 가치를 실현한 역사적 경험이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김중수 KDI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