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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문화재가 털리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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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해 12월 7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사무소 직원은 '남은들 상여'(중요민속자료 31호) 보호각에 청소하러 갔다 깜짝 놀랐다. 상여 위에 있던 장식품들이 몽땅 뜯겨져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국가지정문화재인 이 상여는 흥선대원군이 160년 전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 묘를 가야산 기슭으로 옮길 때 쓰고 당시 운구를 도왔던 인근 주민들에게 준 답례품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전국에서 일어난 문화재(지방문화재 포함) 도난 사건은 56건. 잃어버린 유물은 총 2531점에 이른다. 이 중 되찾은 것은 2.3%에 불과한 57점뿐이다.

범인들은 절도 대상을 고문서.탱화 등 소품 위주에서 문짝.석불.석탑으로 확대하고, 심지어 건물 주춧돌까지 뽑아가고 있다. 관리가 소홀한 지방의 종갓집.향교.암자 등이 주요 표적이다.

◆ 대담한 도둑들=지난해 2월 보물 350호인 대구 달성군 도동서원 중정당의 기단석(건축물 기초로 쌓은 돌)이 도난당했다. 기단석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모습이 조각돼 있었다. 지난해 3월엔 경기도 파주 교하읍 당하리 한 야산의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에서 높이 170cm의 무인석 두 개가 도난당했다. 범인들이 크레인 달린 트럭을 동원해 훔쳐간 것으로 추정됐다.

최근 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저수지 옆에 있는 한 문중의 옛 가옥에 문짝 4개가 뜯겨 나갔고, 전북 고창군 해리면의 한 문중 고가옥에서도 사당.강당의 문짝 8개가 사라졌다. 지난해 9월 강원도 홍천과 경북 의성에선 3층석탑 2기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고려시대 탑으로 높이가 각각 192, 160cm나 돼 옮기기 힘든 '거구' 문화재였다. 경남 함안에선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3점이 없어지기도 했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세준(60.진성 이씨 대종손)씨는 2000년 8월 "경북 안동 와룡면의 종가에 17번이나 도둑이 들어 홀로 계신 노모까지 위험할 지경"이라며 문중 고문서 2000여 건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 허점 많은 관리 체계=이처럼 국보급은 물론 전국의 지방문화재가 무방비로 털리고 있는 것은 부실한 관리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서울 5대 궁과 왕릉, 칠백의총, 현충사 등의 문화재만을 직접 관리하고 나머지 지정문화재의 관리는 소재지 시.군에 맡긴다. 문화재청은 해당 시.군의 관리 실태를 감독할 권한은 없다.

충남도 문화재인 조선시대 명재상 한음 이덕형의 영정이 7년 전 도난당한 사실은 최근에야 밝혀졌다. 문중에서 잃어버린 사실을 숨기고 모사품을 걸어둬 충남도에서는 전혀 몰랐다. 도 관계자는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에 준비하기 위해 영정을 살피던 중 진품이 아닌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선 시.군은 문화재를 철저히 관리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이다. 충남 천안시는 광역단체(충남도) 지정문화재를 포함해 60점을 관리하는데 담당 직원은 세 명에 불과하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최종호 문화재관리학과 교수는 "도난 문화재 유통을 원천적으로 막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화재를 데이터베이스화해 경찰서.세관 등에서 도난품 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전=조한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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