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0) 제81화 30년간의 문화계(43) 조용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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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만주사변 때에는 약간 술렁거렸지만, 일본군부의 콧대가 세어서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고 우리들은 관망만 하고 있었는데, 반제동맹사건은 정작 우리들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으므로 쇼크가 퍽 컸다.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나가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밤사이에 별일이 없었느냐고 서로 보고 웃어댔다. 사건의 주동자가 대부분 1학년 학생들이어서 1학년 학생들이 많이 끌려갔고 2학년·3학년 학생들도 더러 끌려간 것 같지만 정확한 수효는 알 수 없었다. 예과 때 한 반이던 우리 열 한 명만은 다 무사하였다.
세상에서는 경성제국대학이 쑥밭이 되었다고 떠들어댔고, 특히 일본인 학생이 조선독립에 동조하였다는 사실에 모두들 크게 놀랐다. 그때까지는 우리들을 장차 총독정치의 앞잡이가 될 놈들이라고 멸시하던 지식인들도 우리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 같았다.
19월 보름께 주모자인 신현중이 체포됨으로써 검거는 일단 끝났고 세상 소문도 차차 가라앉아 갔다. 나는 졸업논문을 제출해야할 날짜가 촉박하였으므로 집에 틀어박혀 열심히 논 문을 썼다. 그러나 마음은 안정되지 않았다.
나는 제일고보 동창들을 통해 법과를 중심으로 한 독서회가 있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의과대학에도 이런 독서회가 있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직후의 어느 날, 오후 강의를 끝내고 학생공실 (휴게실이란 일본말) 에 들러 공고를 보니까, 학교에서 수업료(지금의 등록금)를 내지 않은 학생들의 성명을 발표하고 끝에다가 어느 날까지 납입하지 않으면 정학을 시키겠다고 경고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공고 옆에 커다랗게 백묵으로 『정학처분 절대반대』 라고 씌어 있는 것이었다.
수업료를 미납한 학생은 대부분 조선학생이었고 내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그때 수업료라는 등록금은 예과 때에는 3학기로 나뉘어 1학기 2학기가 20원씩이고,3학기가 10원이어서 합계 1년에 50원이었다. 학부에 올라와서는2학기제로 되어 한 학기에 50원씩, 합해서 1년에 1백 원이었다. 그때 50원은 큰돈이었다.『정학처분 절대반대』 라고 쓴 글씨가 조선학생의 글씨인 것을 보고, 혹시 독서회 회원의 짓이 아닐까하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반제동맹에서 한 학내투쟁의 하나였다는 것을 공판정에서 그들의 자백으로 알게되었다.
나는 타이프라이터를 빌어다가 서투른 솜씨로 열흘이나 걸려 50장 가량의 논문을 찍어냈다. 영문과 졸업생은 모두 일곱 명이었는데, 교수들이 논문심사를 스무날동안에 걸쳐 끝내고 2월10일에 구두시문을 한다고 발표하였다.
나는 졸업논문을 내놓고 나머지 못따 놓은 학과시험을 다 끝냈으므로 3월25일의 졸업식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큰 걱정은 취직이었다 .법과 졸업생은 관리나 은행으로 들어가는 것이 제일이지만, 관리는 예산긴축으로 쓰지 않고, 은행이나 회사도 혹심한 경제공황으로 신규채용을 못하고 있었다. 문과 졸업생은 중학교 교원밖에 갈 데가 없는데, 한군데 학교도 교원을 새로 채용하는 데가 없었다. 이 때문에 영문과 선배들도 모두 놀고있었다.
그 좋은 예가 나보다 2년 선배인 이효석이 경무국 도서과에 할 수없이 취직하였다가 한 달만에 그만둔 것은 이미 이야기한바와 같다.
한쪽에서는 반제동맹 같은 사건이 생겼지만, 매력 있는 직업은 관리인 듯 싶어서 문과를 졸업하고 나서 법과를 다시 더 하는 학생이 셋이나 있었다. 고등문관시험에 패스해서 도지사를 한자리하고싶은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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