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임마누엘 칼럼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어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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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근혜 대통령이 6월에 미국을 방문한다. 박 대통령이 미국에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내게 묻는 한국인 친구들이 많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박 대통령은 무엇보다 한·미 동맹의 굳건함부터 재확인해야 할 것 같다. 최근 미국을 방문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성공적으로 새로운 미·일 허니문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일 정상회담의 화려함 뒤편에는 뭔가 억지스러운 게 있었고 논의의 결과는 애매했다. 떠들썩하게 미국과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정체 상태다. 양국에서 모두 인기가 없다.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게 사실이다. 새 지침으로 양국 군은 전 세계에서 긴밀히 협력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이 그러한 역할을 맡아야 할 긴급한 필요성이나, 일본 평화헌법의 폐기가 아시아를 더 안전하게 만들지에 대한 미국 내부의 합의는 없다. 의회가 뭐라고 하든 말이다.

  박 대통령이 상기해야 할 것은 그의 방미가, 아베의 방미 ‘이후’가 아니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10월 방미 ‘이전’에 이뤄지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점이다.

 지난달 미·일 정상회담과 지난해 미·중 정상회담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 쪽은 미·중 정상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반과학주의적 고립주의자들이 지배하는 공화당보다 오히려 시 국가주석과 더 마음이 통할 것이란 관측까지 나왔다. 미·중 협상은 쉽지 않았지만 진지했다. 아베 총리의 방미 때와는 달리 거창한 환대는 없었지만 양국 정상은 군사협력을 위한 역사적인 합의에 도달했고 기후변화에 공동 대처하기로 했다.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이를 환영했다.

 박 대통령의 최상의 접근법은 보다 넓은 스펙트럼의 미국인들이 관심 가질 사안을 향해 동북아 안보 논의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솔직히 이는 의회의 시끄러운 정치인들조차 별 관심이 없는 사안들이다. 한국으로선 아시아를 위한 차별성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없다. 현재 미국의 정책은 비뚤어졌고 파괴적이며 낭비적이다. 일본의 군사화를 지지하고 있으며 한국이나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사안 때문에 중국과 맞서고 있다. 그래서 한국은 새로운 주장을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유일한 나라다.

 박 대통령은 미국에 갈 때 전용기에 기후변화, 인신매매, 핵 비확산, 사이버 범죄와 같은 핵심 분야의 전문가들을 가득 채워야 한다. 한·미 양국의 전문가들은 낮은 자세로 토론에 임해야 한다. 번지르르한 게 아니라 실체가 있는 결과를 내놓기 위해서다. 그렇게 하는 게 아베를 ‘넘어서는’ 길이다.

 한국은 미국이 미·일과 보다 긴밀한 군사협력을 추진하자고 제안한다면 긍정적으로 반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협력의 본질은 신중하게 정의돼야 하며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면밀한 검토를 거쳐야 한다. 저작권 침해나 이민 문제라면 한국과 일본은 협력해야 한다. 하지만 베트남·중국 등 국가들의 협력도 필요하다. 사이버 보안 문제의 경우에는 한·중·일뿐만 아니라 러시아·몽골도 협력에 참여해야 한다. 미사일, 재래식 무기, 사이버 전쟁, 드론 같은 최신 기술과 관련된 문제는 다자간 조약을 통하는 게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맹목적으로 국방 예산을 증가시킨다면 군비경쟁이 동남아와 중앙아시아로 확산될 뿐이다.

 박 대통령은 기후변화나 무기 확산 같은 미래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양자 조약이나 3국 동맹으론 불충분하다는 점을 미국 국민에게 강력하고도 현명하게 호소해야 한다. 그러한 주장은 우리 시대의 심각한 이슈에 대한 언급이 없어 진부했던 아베 총리의 연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룰 것이다.

 어쩌면 한국인들은 워싱턴 컨센서스에 맞서는 게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두려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한국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나는 느끼고 있다. 박 대통령이 구체적인 정보와 논리를 바탕으로 이런 주장을 전개한다면 침묵하는 다수는 한국이 화려한 외양이 아니라 실질적인 사안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 감탄할 것이다. 그러한 제안은 한국이 신뢰할 만한 동맹이라는 것을 여실히 입증할 것이다. 이를 위해 박 대통령은 해양오염, 사막화, 지하수 오염, 빈부격차 심화 등을 해결하기 위한 전 세계적 대응과 협력의 토대까지 제안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은 글로벌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한국이 시대착오적인 미국의 대중(對中) 봉쇄정책을 지지하는 척하면서 동시에 중국과 모든 수준에서 더 긴밀한 협력을 추구한다면 한국은 틀림없이 표리부동하게 보일 것이다. 미국이 한·중·일과 어떻게 협력해야 할지에 대해 한국이 새로운 정책 비전을 제안한다면 한국은 워싱턴에서 지지자를 얻게 될 것이다. 한국의 비전은 진정한 혁신으로 인식될 것이며 박 대통령의 방미는 시진핑 주석 방미의 웅혼한 서곡이 될 게 분명하다. 그래야 박 대통령의 방미가 역사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